[월간한옥 레터 #7] 둘, 돌 놓아 시작된 ‘물 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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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한옥 레터 07 - 잇다, 새로운 연결의 시대상



둘, 돌 놓아 시작된 '물 위의 길'



터를 이어주는 '다리'

동서로 흐르는 한강을 남북으로 잇는 다리가 31개나 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지금은 육지와 바다의 섬도 다리로 이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지만, 다리가 없던 그 옛날에는 배를 타고 오가야 했습니다. 다리는 물이 가로지르는 터의 사이를 이어 이동을 더욱 편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옛날에도 배가 뜰 수 없을 정도의 냇가나 작은 물길에는 다리를 놓아 이동 했습니다. 


다리는 언제부터 생기게 된 것일까요? 

큰 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부터 시작한 다리는 길고 커다란 장대석 위에 돌을 쌓아 만드는 돌다리, 나무를 엮어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드는 섶다리까지, 한국의 다리는 재료와 환경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다리들이 있습니다. 

월간한옥에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장헌덕 교수님이 들려주는 ‘한국의 다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고주환


한국의 다리-평교

글·사진 장헌덕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한반도는 지형학적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백두대간의 높고 낮은 산세는 국토의 63%를 차지해 이들 계곡 사이에서 흘러내린 작은 여울의 물길은 굽이굽이 돌아 금수강산을 이뤘다.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우리의 조상들은 수천 년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이 강가를 따라 벼농사를 시작으로 겨울에는 찬 바람을 막아주고 그 앞쪽으로는 시내가 흐르는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원시적인 집락을 이루며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다리는 물 위의 길이다. 언제부터인가 강가의 큼직큼직한 돌을 사람의 보폭에 맞추어 개울에 놓아 강을 건너게 하고 “징검다리”라 했다. 이 징검다리는 개울을 건너는 원시적인 통행수단이었다.


하천 위에 원시적인 다릿발(橋脚)을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와 세로대를 엮어 틀을 짜고 소나무 가지 등을 꺾어 상판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한 다리를 “섶다리”라고 했다. 다릿발이 높아 물이 지나가는 통수량은 많아졌지만, 홍수가 나면 다리가 모두 떠내려가 상판과 다릿발을 칡덩굴 등으로 견고하게 얽매지 않고 홍수 때 상판만 떠내려가도록 했다고 한다. 물속에서 다릿발을 세우는데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수고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고육책이었다. 


안동 하회마을 섶다리  ©배영모


전설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시기,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안동지방으로 파천(播遷) 왔을 때 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영접을 했다. 노국공주가 안동 시내의 얕은 물을 건너게 됐다고 하는데 이때 영접 나온 젊은 부녀자들이 시내 위에 엎드려 다리를 놓아 노국공주를 건너게 했다고 한다. 안동시에서는 201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과 강 건너 부용대, 그리고 유서 깊은 서애(西厓) 류성룡 선생이 거처했던 옥연정사(玉淵精舍) 앞 강가를 잇는 전통적인 섶다리를 놓아 이 행사를 재현했다.


안동 하회마을 섶다리 재현  ©배영모

한내 돌다리


돌다리는 처음에 많은 공력이 들어가지만, 나무다리보다 내구성이 있고 홍수에도 쉽게 떠내려가지 않아 고을과 고을을 이어가는 통행의 수단으로 전국의 여러 고을에 놓이게 됐다. 한내 돌다리는 충남 대천 천에 놓였던 돌다리로 일제 강점기까지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나 새 도로가 개설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다리도 붕괴해 대천읍사무소로 옮겨 보존하다가 1992년에 현재 위치에 일부 복원됐다.


원래 12칸 돌다리였는데 현재는 6칸이 남아 길이는 12m, 너비는 1.9m 정도다.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장대석과 잡석을 쌓아 조적식(組積式)으로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장대석을 3열로 얹어 상판을 구성했다. 교각석과 상판석이 만나는 부분은 상판석의 하부를 따내어 견고하게 맞춤했다. 보령에서는 매년, 이 다리에서 12칸 돌다리밟기 향토문화축제가 열린다.


<월간한옥 24호 글 중 일부 발췌>


한국의 다리에 관한 장헌덕 교수님의 글은 월간한옥 24호에서 더욱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