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공간] 공간회상, 흔적의 상상으로 조우한 윤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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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회상/ 공재고택
흔적의 상상으로 조우한 윤두서

박경철


조선의 영화(榮華)는 지금과 다른 걸까. 켜켜이 펼쳐진 청보리 밭을 넘어 흔적이 멈춘 한적한 산길에 들자, 숲은 나무의 가지를 길가로 뻗어 이방인의 차를 스치듯 만진다.


인기척이 그리워 내민 가지와 차창이 스치는 소리에 돌아본 창밖에 폐허가 된 집터를 지나고 있었다. 시선이 고정돼 머리를 돌아보지만 숲의 작은 손과 뒤틀린 길의 향배는 뱃머리를 흔들 듯 넘실거리는 파도의 너울처럼 이방인의 눈을 한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 못내 시선 밖으로 사라져 버린 민가의 흔적은 선생을 조우하려 나선 여정의 행로를 상상하게 한다. 


대문의 흔적 없이 마당이 트인 집 마루는 왼쪽 높은 지대의 사당 앞에 야자수를 심고 오른쪽 길게 배치된 사랑채 맞배지붕 끝자락 길을 경계 삼아 놓아 고목의 향나무를 거느리고 있으며 앞산을 비켜 트인 곳에는 바다가 보인다. 현산면 백포마을 해변을 향한 공재의 고택은 마을 뒤쪽에 나지막 솟은 망매산을 주봉으로 양쪽 산줄기를 안으며 바다를 향해 있다. 



선생의 흔적은 멀리서 찾아온 이방인들을 스스럼없이 받아주었고 사당으로 발길을 향하게 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벽처럼 가로놓인 사랑채를 대면하며 오른쪽 사당으로 향하고 있었고 높게 자란 한옥 앞의 야자수는 흔적의 공간으로 도입하는 열차 역의 깃발 같았다.


노랗게 빛바랜 벽화의 색감은 단색의 색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의 혼재함을 막역히 느낄 수 있으며 시선의 주변을 경건하게 만드는 주술 같은 눈가림 같다. 가문의 흔적만으로 남긴 공간을 수호하는 기운에게 인사를 건 낸 후에야 펼친 벽화의 그림 속을 이야기 듣는 듯이 바라볼 수 있었다. 빛바랜 노란 배색 위에 나비와 연꽃 곡식과 풍요를 느낄 수 있는 눈의 펼침은 조선의 남도에서 그 영화를 빛 발하던 고산 윤선도 가문의 시간을 거슬러 짐작할 수 있다.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는 가문의 소리는 조용하게 남겨진 빈 공간의 외로움과 대비되는 서운함이 배어 나오는 듯하다.



긴 맞배지붕 사랑채의 중간 작은 문으로 이어진 길에서 안채로 다다를 수 있으니 그 공간을 지나며 느낄 수 있는 시공감은 시간 여행의 비좁은 길목을 지나는 상상을 부른다. 안채의 마당에 들어서 집의 공간에 안기니 그 시절 위세와 화려함을 느껴볼 수 있고 사라져 버린 집채들의 그려보니 바다를 앞둔 해남 땅에 그 풍경이 웅장했을 듯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무 표질을 세세히 보니 화려하고 웅장해 그 표면이 범의 무늬처럼 흔들리던 결은 아슬아슬하게 삭아버리는 나무의 현상이다. 외로움에 겹 쌓여 그 말을 잃은 벙어리처럼 집은 가련하고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옛날 조선을 호령하던 위세와 화려함의 기억은 빈 공간으로 남아 흔적의 발길을 회상하는 이들의 위로에 버티고 있다.



공재의 자화상을 상상하며 조우하려던 공간의 기대는 여지없는 외로움과 그에 대한 송구함으로 대신하고 있다. 차마 발길 하여 뒷산 선생의 묘를 찾지 못하고 대문 없이 펼쳐진 사랑채 마당의 빈 땅에서 남해 보이는 바다만 멍하니 조우한다. 


선생의 증조부인 고산 윤선도가 지은 공재 고택은 사료로 추정하면 인조 8년(1630년)에 건축된 것으로 예상하고 안채의 종도리 장여 밑의 중수 상량문에 따르면 현종 11년(1670년)에 건립하고 순조 11년(1811년)에 중수 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인조 8년에 시작한 공사와 증축이 이어져 50여 채의 건물이 군락을 이룰 때 건립과 이후 중수된 시기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 소모품으로 상용하는 기와 중 안채 지붕의 회첨골 암막새에 적힌 명문에는 공재 선생 사후 1730년 제작된 기와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