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한옥 레터 #37] 약 120세, 한국의 크리스마스

조회수 776


크리스마스 풍경, 1975 ⓒ국가기록원


ㆍ새해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날, 크리스마스  


정들었던 365일을 지난해로 보내기 아쉬워 우리는 '연말'을 하나의 이벤트처럼 즐깁니다. 12월 31일 그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금세 지난해는 잊고 신년회 약속을 잡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연말은 한 해를 잘 살아냈다는 뿌듯함과 가까운 주변 이들에게 덕분에 잘 보냈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훈훈한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말이 되었음을 거리를 채운 따뜻하고 신나는 캐럴과 색색의 조명으로 밝힌 나무, 반짝이는 방울이나 반짝이는 온갖 장식품, 선물을 받기 위해 걸어둔 양말 등이 만들어 내는 풍경으로 가장 먼저 체감하고 있습니다. <나 홀로 집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한국의 연말 분위기는 곧 크리스마스 장식과 함께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캐럴이 나올까 내심 기대도 하면서 말이죠. 365개의 날들 중에서도 12월 25일은 단일한 하루로서 가장 특별한 대우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며 그 영향력을 두루 끼치는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주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부산신문」, 1948년 12월 23일 ⓒ국립중앙도서관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의 탄신을 기념하는 날로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동북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만이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48년, 시행된 것은 1949년부터입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신자가 전 국민의 5%밖에 되지 않았으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만들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을 거로 여겨집니다.


반면에 전통의 강호였던 불교계가 수십 년간 애쓴 끝에야 1975년에 '부처님 오신 날'로 국가 공휴일이 지정되었으니 두 종교 간에 30년간의 격차가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크리스마스를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와 예수에게 축하를 보내기보다는 대중적으로 즐기는 날이 되어 종교적 의미는 다소 옅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 풍경, 뉴욕제과 앞 1975 ⓒ국가기록원


ㆍ크리스마스, 조선 ver.  


최신의 크리스마스는 본래의 종교적 의미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죠. 기독교인을 제외하고 많은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캐럴이나 산타, 빨간 선물 상자, 맛있는 음식 등을 떠올릴 겁니다. 이전에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전통적 세시풍속은 있었으나 크리스마스로 인해 그 형태는 매우 달라졌죠.


처음부터 크리스마스가 지금과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공휴일로 지정되기 이전에 크리스마스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기 바로 직전이었죠. 크리스마스의 등장이 다소 늦어진 이유는 조선은 오랫동안 유교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 계열 종교를 박해의 대상으로 삼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끝자락에 등장한 크리스마스는 시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866년 당시 6년간 진행된 병인박해를 비롯해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과 자연스러운 세계의 흐름 속에 조선은 최초의 태극기가 사용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과 수교를 맺기 시작했으며 그 와중에 1884년 갑신정변이라는 서구식 근대화의 시발점과 같은 사건을 맞이하며 본격적인 변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서울중구 명동성당 소장 기독교 선교사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ㆍ1987년,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록들  


앞선 사건을 기점으로 조선은 다양한 신문물을 받아들이게 됐으며 포교활동을 목적으로 선교사들도 하나둘씩 조선 땅을 밟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는 교회와 병원, 신식교육시설과 다양한 문물이 들어왔고 백성들에게 신기함과 흥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이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지요. 선교사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성탄절을 맞아 사람들을 초대하여 사탕과 과자 등을 대접하고 함께 기도와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춥고 배고픈 겨울을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이는 따뜻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며 백성들 사이에서는 지금과 같이 크리스마스 무렵의 설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죠.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12월 23일 ⓒ국립중앙도서관


L. H. 언더우드, 신복룡·최순근 역주, 『상투의 나라』, 집문당, 1999, 17쪽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의 부인 언더우드 여사의 전기 『상투의 나라』를 통해 크리스마스 관련 기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언더우드 여사는 왕실의 의료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1987년 크리스마스 이브, 평소와는 다른 백성들의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낀 명성황후가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축제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물었고 언더우드 여사는 왕실의 나무를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하여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은 12월 23일 기사를 통해 "우리 신문도 그날은 출판 아니할 터이요. 이십팔일에 다시 출판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라는 공고문을 싣기도 하였으며, 또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신문으로 여겨지는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 따르면 189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교회와 함께 세워진 최초의 중등 교육기관이었던 배재학당의 회당 앞에 연등을 밝혀 장식했다고 합니다. 당시 종교적인 행사로는 우리의 세시풍속 중 하나인 4월 초파일이 익숙했기에 탄생한 연등으로 밝히는 크리스마스였던 거죠. 나름 멋진 풍경이었을 것 같습니다.


논산 구 강경성결교회, 월간한옥 23호 한국의 천장  ⓒHanok_magazine ⓒAPC


ㆍ한국적 크리스마스  


하지만 이후 크리스마스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소소한 축제를 넘어 연말을 맞아 그저 먹고 마시는 유흥의 날로 변해갔습니다. 크리스마티 파티 광고에는 요리와 술, 미녀의 서비스가 실려 있으며 신문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여성들에게는 쇼핑을 위한 핑계이자 기회로 자리 잡았다고 이야기하며 연말을 노린 상술 정도로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갔다'라며 규탄을 할 정도였죠.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1949년 공휴일 지정 이후, 1982년까지 남아있던 야간통행금지 속에서 유일무이한 '통금'없는 날로 더욱이 밤늦게까지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날로 입지를 굳히게 됐습니다. 이후 1970년대 무렵을 지나며 크리스마스는 유흥보다는 산타의 이미지가 강해지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연인, 가족끼리 함께 즐기는 가족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는 시민들에게는 자유의 상징이자 연인들에게는 낭만을 아이들에게는 기쁨을 선물해주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백 년이 조금 넘는 한반도 크리스마스의 역사는 서구화와 산업혁명,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사건들과 함께 변화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적이라는 건 무엇일까요. 한글, 한옥의 지붕과 처마, 저고리, 온돌, 옹기 등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조금 시야를 넓힌다면 결국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존재하고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지금에 이르러 어떤 모습으로든 남아있는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는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힘주어 정의하기보다는 우리만의 시선으로 발견한 현상을 담담하게 전달하고, 독자를 통해 자유롭게 해석되기를 바랍니다. 그 고민의 흔적 또한 이 시대의 일부로 남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음 뉴스레터는 1주 후에 발송될 예정이며 올해의 마지막 월간한옥인 34호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