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한옥 레터 #29] 술의 디자인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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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한옥 33호, 박재서 명인 안동소주 ⓒ강진주 ⓒ월간한옥


ㆍ병과 잔, 술의 정체성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말은 근현대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많은 디자이너가 해석하고 적용해왔습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많은 디자인은 개념적으로나 형태적으로 현대의 디자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며 산업시대 디자인의 기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술을 담는 병과 잔의 디자인 또한 20세기 무렵 정형화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이나 분위기에 으레 연상되는 술이 있는 것처럼 술과 도구의 디자인은 무엇보다도 술을 연상시키는 가장 상징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 오는 날에 마시는 막걸리는 디자인으로 치면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이 되고 경쾌하게 짠을 하는 문화는 사용자 인터페이스UI, User Interface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금빛 양은 주전자와 잔, 초록 소주병과 가볍게 쥐고 꺾어 넘기는 투명한 소주잔, 살얼음이 끼도록 차갑게 얼른 두툼한 맥주잔을 보고 있자면 술 생각이 절로 납니다.


월간한옥 33호 '술과 향유'를 통해 과거와 현재, 술은 어떻게 디자인되어 있는지 살펴보세요.


 백자양각쌍학문 계영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ㆍ 예나 지금이나 절주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


계영배란?


계영배는 1700년대 강원도의 도예가 우명옥이 자신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며 빚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술잔'이라는 뜻으로 절주배라고도 불리며 보통 잔과 비슷해 보이지만 잔을 가득 채우려고 할수록 아래 있는 구멍으로 술이 떨어집니다.


계영배는 액체의 압력과 대기압, 중력을 이용한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사용하였으며 KBS스펀지 129회에 소개된 적도 있습니다. 같은 원리로 만든 커피도 있죠. 계영배는 잔의 7부쯤이 되는 높이가 넘어가도록 술을 따르면 전부 밑으로 흘러 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잔의 7부를 넘지 않도록 따라야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과음과 그로 인한 후회를 방지하고 술을 온전히 음미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죠.


역시 술이 탄생한 이래로 과음과 후회의 굴레는 늘 인간과 함께였던 것 같습니다. 한편 계영배를 보고 있자면 여전히 과음과 후회를 반복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을지로 문화옥 ⓒ김재우 ⓒ월간한옥


ㆍ 7부, 이상적인 술 따르기


계영배와 마찬가지로 현대에 마시는 소주 또한 잔에 7부를 채우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소주잔은 약 50ml며 7부를 채웠을 땐 35ml 정도가 됩니다. 초록 소주병의 용량은 360ml니 7부를 채웠을 땐 거의 열 잔 정도가 나오게 됩니다. 둘이서 딱 다섯 잔씩 나눠 마실 수 있는 것이죠.


지금에야 '혼술'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됐지만, 소주는 여전히 둘 이상의 사람이 잔을 부딪치며 함께 즐길 때가 어울리는 통과 대화의 술입니다. 역시 소주는 소주잔에 채워 짠하고 마셔야 제맛이죠.


을지로 진미네 ⓒ김재우 ⓒ월간한옥 


ㆍ 병은 하나인데 이름은 여러개, 초록병 소주 


지금에야 다양한 술들을 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소주라고 하면 초록병 한 가지만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초록 병의 시초는 1994년 출시된 두산경월의 그린소주였습니다. 초록이 주는 친환경적이고 깨끗한 이미지로 '독하지 않은 소주'를 표방했습니다.


그리고 이 초록 병의 소주가 큰 인기를 끌며 경쟁사도 따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2009년 재사용을 늘리고 환경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환경부와 소주 업계는 소주병의 공동 제작, 회수를 약속하는 '소주병 협약'을 맺게 됩니다. 당시 가장 많이 판매되던 '참이슬'의 병으로 통일하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소주병이 되었습니다.


청강주, 일엽편주, 에빗 레스토랑 ⓒ김한결 ⓒ월간한옥

 

ㆍ 변화하고 탄생하는 술의 정체성


요즘 이태원에는 길거리 서서, 혹은 인도에 걸쳐 앉아서 소주를 병째로 들이키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K-콘텐츠,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희석식 소주가 좋은 술이라는 것에는 확신이 어렵지만, 대외적으로 초록 병의 소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갖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잔과 병의 디자인은 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환경적, 비용적인 이유로 새로운 병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다양한 전통주를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이 즐기는 요즘, 술병과 잔을 구경하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