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한옥 레터 #32] 유배지에서 피어난 마스터피스

조회수 530



강진책빵 ⓒ월간한옥 / 강진주


ㆍ책과 강진군  


사진은 강진군에 위치한 책방이자 빵집 '*강진책빵'입니다. 책과 강진군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누구나 알지만, 주변에 읽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강진군'도 비슷합니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가 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강진책빵: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보은로3길 48


왜 갑작스러운 강진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10월 강진에서 제8회 한옥건축박람회가 개최되기 때문입니다. 유명 배우들이 작품을 홍보하기에 예능 프로에 출연하는 것처럼 이번 뉴스레터 또한 강진에 대한 이야기를 게스트로 모셨습니다. 물론 예능도 뉴스레터도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박람회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고, 우선 본업에 충실하게 '강진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김정희 필 세한도(金正喜 筆 歲寒圖), 국보 제 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ㆍ유배지, 좋은 휴식처를 찾는 키워드  


김정희 필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배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산과 바다에 둘러싸인 조용한 동네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소박한 집 한 채입니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며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점잖게 앉아 글을 읽거나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은 그 사람이 유배를 당한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기에는 조금 고상하지만 말입니다. 유배라는 것 자체도 나름 신분있는 자에게만 내려지는 엘레강스한 처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신기하게도 지역의 명소를 검색하다 보면 과거 조선시대 누군가의 유배지였던 곳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벌을 받으러 갔던 길을 내 휴일과 자본을 써서 구경하러 간다는 사실이 새삼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그런 시대입니다. 조선시대 사람이 봤다면 호강하는 소리 한다 싶겠지만 현대인에게는 유배지만한 휴식처가 없습니다. 다시 도시로, 한양으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반갑지 않습니다.


지방 도시의 자연경관까지 도달하는데 더 많은 품이 들던 과거에 유배지를 찾은 이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요. 


다산초당(茶山草堂) ⓒ월간한옥 / 김기용


ㆍ아파르토멘토와 다산초당  


강진에는 유명한 유배지가 있습니다.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다산초당입니다. 정약용은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며 정치가, 법학자, 지리학자, 의학자, 건축가 등 멀티플레이어였지만 무엇보다도 필력이 뛰어난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책으로서 그 다재다능함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으로 <목민심서>라는 걸작이 있으며 그 외에도 최신 유행 웹툰 이름 같은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흠흠신서: 오늘날로 따지면 로스쿨, 경찰공무원 준비생이 읽는 형법 및 형사소송법 교재에 해당함.


만약 정약용이 유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도시에 남아 밤새 촛불을 밝히며 야근을 했던 워커홀릭이었다면 스타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스페인발 잡지 <Apartamento, 아파르타멘토>는 아티스트와 디자이너가 생활하는 공간을 담은 인테리어 라이프스타일 잡지입니다. 창작력이 돋보이는 누군가의 공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주목 받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파르타멘토가 조선시대에 있었다면 한국의 유배지와 표지로는 다산 초당을 싣지 않았을까요.


표제는 "The Most Famous Artist's Workplace in Chosun"


사의재(四宜齋) ⓒ월간한옥 / 김기용


ㆍ정약용과 인스타그램  


아파르타멘토라는 잡지의 본질은 공간 구성과 놓인 생활용품을 통해 창작자의 취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소셜 네트워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취향을 바탕으로 입고, 보고, 먹는 것을 구경하는 창이죠. 그 취향이란 하나의 브랜드이자 신뢰의 대상이 됩니다. 성시경의 '먹을 텐데'에 나온 식당을 찾아가 소비를 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입맛과 취향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와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작자 정약용의 취향은 어땠을까요. 만약에 그가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말입니다. 


1) 사의재(四宜齋), '네 가지(용모, 말씨, 성품, 행동)을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

사의재는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 최초로 머물렀던 주막집입니다. 처음에는 죄인이 강진으로 내려왔다는 소문에 주막 손님들과 백성들이 기피하였으나 주막 노파가 정약용의 사정을 알게 되어 호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약용은 주막에서 4년을 머물고 떠나면서 감사의 뜻으로 사의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감사의 뜻으로 브랜드 이름과 컨셉을 잡아주고 떠난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크리에이터의 브랜딩답게 사의재는 현재까지 스토리가 담긴 한옥체험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성각(茶星閣), 다산초당(茶山草堂) ⓒHanok_magazine ⓒAPC


ㆍ사의재와 다향산방  


다산초당의 새겨진 또 다른 이름인 다성각(茶星閣)은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호인 다산(茶山)에도 차 다(茶)를 사용했을 정도로 차에 대한 정약용의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차를 즐기는 데에는 물론이고 시를 짓거나 차나무 재배법, 차 무역에 대한 글도 남길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취미가 업이 된, 그것도 잘하는, 이상적인 사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월출산 다향산방

다선(茶仙) 이한영은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로 시작된 우리나라 차역사의 맥을 이어온 다인입니다. 189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녹차 브랜드인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세상에 내놓은 인물입니다. 이한영 선생은 차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백운옥판차라는 상호와 함께 꽃을 도안한 포장지를 제작해서 사용했습니다.


이한영 생가와 다향산방(현 백운차실)은 월출산을 배경에 두고 '이한영 차 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이한영 선생의 후손이 대를 이어 지켜오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대에 상호와 패키지를 갖춘 당대 차 브랜드를 선보였던 이한영 선생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이한영 차 문화원은 차 제품 기획과 패키지, 백운차실의 공간 인테리어, 공식 웹 사이트까지 꽤나 잘 갖춰져 있습니다.


명발당 전경 스케치, 수채화, 이관직 ⓒHanok_magazine ⓒAPC


ㆍ강진 명발당과 소대정, 정약용과 해남 윤씨의 인연이 시작된 공간   


집은 사람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속에는 이름이 생기고, 이름이 이어지고,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다시 이야기에 중심이 된다. 이름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름 없이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조선 시대 이야기 중에는 여자의 이름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의 경우 족보를 토대로 연구될 수밖에 없는데, 가문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해남윤씨의 족보에는 남녀가 평등하게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특이한 것이다. 


‘해남윤씨 족보 목판’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족보는 부계는 물론 모계까지 모두 기록하고, 자녀를 남녀 순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서로 기록하고, 외손까지 남기고 있다고 한다. 장약용의 아버지와 결혼한 윤두서의 손녀 윤소온의 이름을 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월간한옥 28호, 강진 명발당과 소대정 중에서, 이관직-

정약용이라는 시대의 크리에이터는 많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월간한옥 28호에는 정약용의 유배 시절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을 맺고 있는 해남 윤씨와 그 인연이 시작됐던 공간인 명발당과 소대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읽어도 인상 깊은 이야기입니다. 시대에 상관없이 늘 깊은 인상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걸작 혹은 마스터피스라고도 합니다. 현재까지 도달하며 우리가 쉼이나 감상을 목적으로 찾는 전통문화유산은 시대를 넘어온 마스터피스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