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한옥 레터 #31] 부산, 국제영화제부터 초량왜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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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부산 ⓒWords and Pictures


ㆍ무려 27회, 파죽의 부산국제영화제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됩니다. 1996년에 1회를 시작으로 한 문화예술계 행사로 보기 드물게 성공한 장수 축제입니다. 흥행과 취지라는 두 마리 토끼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 게다가 문화콘텐츠 중앙집중화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지역 행사로 거진 토끼굴을 쓸어 담았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신인 감독과 신선한 작품을 꾸준히 발굴, 시상, 상영하며 자칫 지나친 상업성을 띠게 될 수도 있는 지역 행사에 대한 우려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관심 속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치열한 예매 경쟁을 뚫고 부산까지 발을 옮기는 관객뿐만 아니라 업계 관계자들에게도 즐길 수 있는 연례행사로 자리잡아, 더욱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부산 지역소주 '대선', 대선주조 ⓒWords and Pictures


ㆍVR보다 생생한 왕가위의 폭탄주  


지금도 영화제의 별미라고 한다면 각지에서 발걸음을 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둘러 앉아 술을 마시는 풍경일 겁니다. 술자리에서는 영화 얘기가 끊임없이 오가고 옆 테이블에서도 흥미로운 대화가 이어져 살아있는 콘텐츠의 홍수 자체입니다. 영화인들에게는 재미있는 자리가 아닐 수 없겠죠.


실제로 영화제 초창기 남포동 일대는 영화 상영이 종료되는 12시 무렵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아 버려서 외국 게스트와 평론가들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밤새 술을 마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합니다. 옆에서는 왕가위가 폭탄주를 만들고 벽에 휴지를 던져 붙이고 해운대 포차촌에서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가 술잔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VR로 보는 영화보다 생생한 장면이었을 것 같습니다.


《東萊府使接倭使圖,동래부사접왜사도》, 동래부에 도착한 일본 사신 맞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ㆍ민간 문화 교류의 나들목, 부산  


지금의 초량동과 위치는 다르지만, 부산의 '초량왜관' 또한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있었던 곳으로 부산 근대사를 상징하는 요소입니다.


예부터 부산은 항만을 이용한 무역이 활발했습니다. 특히 가까운 일본과는 더 밀접했죠. 주파수를 잘 맞추면 라디오가 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부산은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에 융성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술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가장 먼저 도착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유한 형태로 유지, 발전하며 그 흔적이 남아 부산의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내고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또한 한일 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입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잡아, 일본에서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을뿐더러 한국에서도 일본 영화의 인기가 꽤나 있는 편입니다.


부산 초량동 다나카 주택(田中筆吉家) ⓒ월간한옥 / 김철성


ㆍ더러워진 벽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  


"상사가 하얀 벽을 가리키면서 "깨끗하게 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얼룩을 닦아 낼까, 아니면 하얀 페인트를 칠할까. 나는 정성껏 얼룩을 닦아내서 오래된 멋을 빛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 나가오카 겐메이 저, 안그라픽스 출판>


삶의 흔적은 중요합니다. 흔적이 없다는 건 지나온 현재의 배경과 근거가 없다는 뜻이니까요. 영화에 등장하는 과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는 친근하기보단 미지의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좋은 기억만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지나간 역사 속에서 두 나라는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뒤엉켜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외면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혹하고 폭력적이었던 시기 역시 이미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흔적을 철저하기 지우기보다는 한때 한국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실제로 존재했던 생활의 흔적으로, 되려 객관적으로 연구, 조사하여 살피고 필요에 따라 보존, 복원 작업을 거치며 현대적 의미를 찾아보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부산 초량동 다나카 주택(田中筆吉家) ⓒ월간한옥 / 김철성


ㆍ어찌 됐건 흔적은 유의미하다.  


"역사적인 건축물의 보존을 위한 수리의 결과에서 느끼고자 하는 것은 건축 당시의 모습과 건축에 축적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월간한옥 27호, 시대의 재발견, 근대건축-


지난 월간한옥 27호에서는 '시대의 재발견, 근대건축'이라는 주제 아래 부산 초량동에 위치한 '다나카 주택(田中筆吉家, 등록문화재 349호)'의 역사와 건축적 특징 등을 다각적으로 살펴봤습니다.


다나카 주택은 여러 번의 증축으로 원형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최초에는 1925년 완공된 건물로 곧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2018년 진행된 복원 작업은 재료와 기법에 있어 1925년에서 1931년까지의 모습을 기준으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공간의 역사는 유, 무형의 형태로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바탕이자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어찌 됐건 흔적은 유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