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5] 완성적 양식과 미적 품격의 결합

관리자
202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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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적 양식과 미적 품격의 결합
<구 벨기에영사관 vs 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이관직


미술관에서 미술 작품이 아닌 건축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이하 남서울미술관)에서 하는 <모두의 [건축] 소장품(Collecting Architecture for All)>이라는 전시이다. 단편적이지만 미술과 건축의 관계에 관한 전시기획자의 생각을 볼 수 있었다. 전시 리플릿에 “서울시립미술관은 ‘수집’의 의미와 공공성 그리고 새로운 동시대적 해석을 구현하고자 2020년 연간 기획의제로 ‘소장품, 수집, 모으기’을 키워드로 설정했다. 이에 첫 전시를 서소문본관과 남서울미술관에서 전시 기간 개최함으로써 소장 행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 소장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라고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는 밝히고 있다. 조금 길지만 하나 더 인용한다. 



“건축은 창작, 해체, 재구성되면서 소장된다. 새로운 집을 설계하고 짓는 창작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개발, 재난으로 소중한 집이 해체되면서 건축 수집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그래서 건축 소장품은 필연적으로 건축의 한 단편이다. … 여러 주체가 생산하는 다양한 규모의 단편을 모아 건축 컬렉션이 만들어지고, 건축 컬렉션을 통해 사회는 자신의 꿈과 욕망, 과거와 미래를 재구성한다. 바로 건축이 <모두의 소장품>이 되는 과정이다.” 건축을 전공한 두 초청 큐레이터가 적은 글의 일부이다. ‘미술관-전시---건축-소장품’의 네 단어를 엮여서 하나의 전시에 담았다. 


전시를 본 느낌은 앞의 두 단어와 뒤의 두 단어 사이가 아직 멀다는 것이다. 사람들도 나와 같이 자신의 경험과 교양을 통해 전시물과 의도 사이의 거리를 메꾸어 보려 할 것이다. 그 거리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전시의 의도일까? 아니면 모인 소장품이 뿜어내는 공명의 에너지일까? 그렇지만 그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획 전시를 하는 남서울미술관의 건물 이름은 ‘구 벨기에영사관’이다.



일반적으로 전시는 교육이나 홍보를 위해 기념물이나 예술 작품 혹은 상품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미술관 전시는 예술 작품을 주로 다룬다. 창작 과정에서 본다면 예술 작품은 작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깨달은 세계에 대한 진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깨달은, 혹은 추구해 온 진실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과 소통할 매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 매체가 예술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것, 자신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진실-매체-소통’이 예술 전시의 배경이다. 건축도 예술로 이해되기도 한다. 창의적인 작업, 감동적인 공간과 형태는 예술과 유사하게 ‘진실-매체-소통’을 통해 창조성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일으킨다. 전쟁, 개발, 재난 또는 이전으로 해체된 채 남겨지거나 불구가 된 건축 부품과 파편들이 미술품 전시와 비슷한 격으로 전시 대상이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아마 ‘시간-미(Timed Beauty)’, 삶의 다양한 흔적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건축물은 예술 작품과 다르다. 건축물은 작가의 세계에 관한 고백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건축가는 양식(Style)을 통해 시대 정신 혹은 새로운 창작을 만들어 가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건축은 ‘용도-예술’에 속한다. 의도와는 다르게 아니 의도가 없어도 예술 작품이든 건축물이든 모든 시각적인 대상은 ‘자극-공명-공감’으로 진행하는 ‘느낌-선호-의미’의 매체로 작동한다.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은 대상을 향해 호감이나 혐오의 방향으로 강하게 혹은 약하게 반응한다. 전시 큐레이팅은 의도와 편집을 통해 사람들의 공명을 공감으로 이끈다. 전체가 하나의 메시지로 읽히도록 노력한다. 


건축 전시인 이 전시에서 보이는 하나하나의 물건은 오래된 누적의 ‘시간-미’를 담고 있다. 미술관이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건축 소장품 전시가 100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이며 해체와 이전 복원을 거친 구 벨기에영사관에서 이루어지기에 특별하다. 분절되고 파편이 된 자신의 부품을 품는 특별한 전체이다. 모든 건축물은 용도에서 시작한다. 건축주의 건축 의지와 건축가의 능력이 잘 결합해 ‘양식-미(Style-Beauty)’가 담긴 통일된 전체로 만들어진 건축물은 흔하지 않다. 구 벨기에영사관은 양식적인 완성도와 ‘도시-미적’ 품격을 지니고 있다. ‘전시-매체-공명-공감’의 관점에서 하나의 전체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면서 특별한 건축 소장전을 여는 구 벨기에영사관을 살펴보려고 한다.

  

해체 후 이전 복원된 건축물


조선 말 그리고 대한제국의 격동기, 외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외교 관계가 강압에 의해 맺어지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유럽의 작은 나라 벨기에도 다른 열강의 뒤를 따라 1901년 대한제국과 수호조약을 맺었다. 이 수호조약으로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영사 재판권, 거류지의 설정, 군함의 자유로운 출입, 여행과 무역의 자유 등 특권이 보장된 최혜국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영사관 위치는 현재 우리은행 본점 자리인 서울시 중구 회현동2가 78, 79번지이다. 당시 작은 중립국인 벨기에는 의회와는 전혀 생각이 다른 식민제국주의자 레오폴드 2세가 국왕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해외 식민지를 소유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사려고 했지만 실패한 그는 개인적으로 부에 대한 욕심이 매우 많아서 당시 유명한 탐험가인 헨리 스탠리에게 콩고 지역을 탐험하게 했다. 그리고 1885년 개인 소유의 콩고 자유 공화국을 만들고 사병을 통해 다스렸다. 



그는 상아와 고무를 착취하면서 토착민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고무 수출로 엄청난 수익을 남긴 레오폴드 2세는 건설에 많이 투자해 ‘건축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벨기에는 19세기 말 아르누보의 중심지가 되었고 많은 건축과 예술 유산을 가지게 되었다. 그 시기에 대한제국의 초대 영사 방카르가 벨기에 영사관을 지어졌다. 영사관은 1903년 착공해 1905년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조로 된 건물로 총건축면적 약 1,570㎡이다. “구 벨기에영사관의 해체공사 과정 및 구축 방법에 관한 연구”(서승현)를 참고해 건축물의 특징과 그 해체 과정을 살펴본다. “벽돌과 석재가 섞여 쓰였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된 현관과 1층의 발코니에는 도리아 오더, 2층 발코니에는 이오니아 오더 석재 기둥이 사용된 것이 특징적이다. 


일본의 호쿠리쿠(北陸) 토목회사에서 시공하고 기사 고다마(小玉)가 설계하였으며(건설기술자인지 설계자인지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니시지마(西島)가 감독했다.” 이 건축물은 1905년에서 1918년까지 13년간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영사관이 충무로로 이사하면서 일본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이용되었다. 1968년 지금의 우리은행(당시 한국상업은행)이 본점 신축을 위해 부근의 부지를 확보하면서 임시로 창고로 사용했다. 1977년 다행히 사적 254호 지정되면서 철거 운명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1993년에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철거 지시를 받은 2년 뒤인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과 달리, 해체 후 이전 복원 결정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상업은행은 본점 건설을 위해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지금의 관악구 남현동 1059-13호에 이전복원하기로 했다. 영사관의 해체와 이전복원공사는 1980년 3월 착공해 1982년 8월 준공했다. 1999년 상업은행은 한일은행과 합병해 우리은행이 되었다. 이전 복원된 구 벨기에영사관은 우리은행의 사적관으로 사용되다가 2004년 서울시에서 무상으로 임대해 전시관으로 리모델링을 한 후 남서울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름다운 신고전주의 건축물


구 벨기에영사관은 아름답다. 주변의 모습도 좋다. 너른 앞마당에는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다. 주변에는 은행나무와 단풍이 심겨 있고 건축물 가까이에는 관리가 잘된 키 큰 소나무가 돌아가며 심겨 있다. 우리나라 공공건축물의 높은 관리 수준 덕이다. 주변에 남부순환로의 복잡한 교통 상황과 상업적인 근린 상가로 둘러싸인 도시적 환경에서 나무 등의 조경 처리로 간신히 분리되어 그나마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건축의 시작이 건축물을 디자인한 건축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는 건축 의지를 가진 건축주보다 시민이 건축물을 향유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글과 그림을 통해 건축물을 다시 보려는 것은 살아남은 건축물을 이용하고 즐기는 시민과 연구하고 평가하는 전문가 사이를 연결하려는 데 있다. 구 벨기에영사관에서 건축가의 양식(Style) 선택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드는 데 중요했던 것 같다. 학자들은 이 건축물의 양식을 고전주의 혹은 신고전주의로 규정한다. 건축물 중앙에 출입구의 포치(Porch) 역할을 하는 발코니가 있다. 건축물 양측에 조금 뒤로 물러난 발코니를 받치고 있는 원형 기둥들은 고전 양식이다. 




1층 기둥의 주두는 도리아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이다. 석재 기둥들은 둥글게 파인 플루팅(Fluting)의 홈을 두르고 있다. 내부의 문 주변 장식과 천장 모서리 몰딩도 고전적인 형태이다. 직사각형으로 돌출된 벽기둥(Pilaster)에도 이오니아식 주두 장식이 있다. 하얀색의 벽과 대리석을 깎아 만든 그리스식 장식과 상세 요소가 건물에 품격을 더한다. 주두나 플루팅은 구법의 내용을 가지지 않는 장식일 뿐이다. 그렇지만 건축사에서 오더(Order)라는 말은 단순히 기둥의 모양, 형식이 아니라 건축양식 자체를 의미한다. 건축양식은 모양과 형식을 통해 구현된 건축물의 통일된 내용이다. 


건축물의 용도가 담긴 공간과 평면 구성, 재료의 사용과 구법도 그 통일된 내용에 포함된다. 외부 입면에 벽돌과 석재를 이용해서 수직과 수평으로 구성한 선적인 배열이 탁월하다. 비례와 입체감이 좋다. 정면은 기본적으로 대칭이지만 지붕에 돌출된 굴뚝이 섬세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건축 구법과 재료 사용이 소박하고 섬세하다. 전체 구조는 벽돌을 쌓아서 벽을 형성하고 위층의 무게를 바치는 조적식 구조이다. 작은 크기의 단위 부재인 벽돌을 접착력이 있는 회반죽이나 모르타르로 채워 쌓아서 벽을 형성했다. 로마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의 거대한 구조에도 사용된 2,000년도 더 된 오래된 구법이다.  1층 바닥은 철골 장선을 한쪽으로 걸고 그 사이에 벽돌로 눈썹 모양 아치를 틀어서 채워 바닥을 형성했다.  2층 바닥은 목재장선을 깔아 나무 바닥으로 만들었고, 지붕은 목재 쌍대공 트러스를 기본으로 변형된 트러스를 덧붙여 복잡한 지붕 모양을 해결했다. 소박한 구법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최적의 구법이었을 것이다. 입체감 있는 형태와 수평을 기본으로 하는 섬세한 비례가 고전주의 기둥과 잘 어울린다.





양식은 누군가의 창의적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하나의 건축물로 실현되고 지역과 시대를 주도하는 현상으로 확장된다. 절정기를 지나 변형과 극적인 왜곡을 거치기도 한다. 지배적인 시기를 지나서 지루해지면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등장하면서 쇠락을 겪는다. 세월이 흐르면 다른 지역, 다른 시간에 유사한 양식이 다시 등장해 당시 주류의 양식과 대립하기도 한다. 다시 유행하는 양식을 복고(Revival) 또는 복고주의(Revivalism, Revival Style)라고 한다. 구 벨기에영사관은 복고주의 양식의 하나인 신고전주의이다. 그리스 양식을 복구한 것이다. 건축가는 100년 전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선택해 설계했고 그 당시 구법과 재료를 섬세하게 통제하면 완성도 있게 건물을 지었다. 신고전주의 설계는 잘 시공된 건설 과정을 통해 1905년에 완공된 후 1918년까지 13년간 사용되었다. 그 후 사용 주체가 네다섯 번 달라지면서 사무 공간, 창고, 사적관을 거쳐 미술관이 되었다. 구 벨기에영사관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주는 힘이 무엇일까? 살아남아서 차량의 소음과 밤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 떠드는 사람들의 풍류 가락 속에서 100년 넘게 살아온 건축물의 매력은 무엇일까? 양식적인 고찰이 그 매력을 밝혀 줄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거나 전달될 수 없는 느낌만 공명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축물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려고 한다. 통일된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연구하는 사람도 그렇고 설계를 하는 디자이너도 그렇다. 연구자들이 일반인들에게 자신의 연구를 전달하는 방법, 즉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시간과 지역을 교차시키면서 서술을 위한 용어인 양식으로 건축물을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도 건축물에서 양식으로 설명되기 이전에 기능성의 실현인 용도와 빛에 의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공간, 도시의 시각적 대상물로서 미감의 만족, 구법과 재료에서 느껴지는 장인과 작업자의 손길, 오랫동안 축적된 삶의 흔적, 그 통일되지 않은 무엇을 사람들은 본다. 설명하기 어려운, 공명, 공감하는 무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