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2] 돌과 화강석이 만든 회화적 아름다움

관리자
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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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과 화강석이 만든 회화적 아름다움

이관직


모든 건축물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의 삶과 이해관계, 욕구와 의지가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건축과 건설이이루어진다. 그렇게 지어진 건축물은 삶의 장소로, 기억과 흔적으로, 형태와 공간으로 남는다. 다양한 이유로 변형되고, 잔존하고, 철거되고, 소멸한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서울시 강북구 도심에 남아있는 아름답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건축물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민족 모두가 일제히 거리로 뛰쳐 나와 독립을 외쳤던 3 · 1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천도교는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동학에서 시작된 우리 민족의 자생적 종교이다. 경상북도경주 출신의 유학자 최제우가 구세제민(救世濟民)의 뜻을 품고 창도한 동학은 서학으로 알려진 천주교(학)에 대응해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한다. 하늘을 의미하는 한울님을 추종한다. 사람은 물론 세상 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시천주(侍天主)’,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자는 ‘사인여천(事人 如 天 )’, 모든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진리로 세계 문명의 새로운 개벽을 지향한다. 동학은 동서양의 침략 세력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각축을 벌일 때 자신의 안락과 세속적 이익을 위해 민중을 포악하게 억압하고, 비겁하게 외세에 빌붙어 나라와 민중을 포기한 탐관오리와 양반들에게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혁명을 선언하고 목숨 건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1863년 교주 최제우가 동학교도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인 1864년 처형됐고, 1894년 동학 접 주 전봉준을 중심으로 투쟁했던 두 차례의 농민전쟁은 청과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동학 조직은 일제강점기 속에서 분열과 배신의 굴곡을 겪었다. 혁명에접주로 참여해 동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용구 등 일진회세력이 동학을 배반하고 부 왜 집단으로 변절했다. 의암 손병희는 배반자를 축출하고 1905년 동학을‘천도교’로 개칭했다. 무력한 조정과 친일파 매국노들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경술년에 국권 피탈의 치욕을 겪게 되었다. 민족의 지도자들은 극악해지는 일본의 만행에 맞서 평화 독립운동을 세계만방에 선포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준비한 끝에 3 · 1운동을 일으켰다.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은 3 · 1 독립선언의 중심 세력이었던 기독교, 불교와 합세해 33인의 민족지도자로서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천도교 신자였다.

1919년 2월 11일에 기초가 완성된 독립선언서는 2월 20일부터 송현동(지금의 덕성여중 고자리) 중앙총부에 있던 천도교 인사 이 종일의 인쇄소 안보 성사에서 인쇄를 시작해 2월 27일까지 3만5,000여 부가 인쇄됐다. 천도교는 실질적인 민족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일제의 억압이 심했던 1910년대에 건설모금을 시작했지만 모금액 대부분이 독립운동자금으로 흘러 들어가서 건설을 연기해야 했다. 3 · 1운동 이후 많은 사람이 투옥되어서 건립추진도 쉽지 않았다. 설계는 동경제국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나카무라 좋아 해이(中村與資平)가 맡았다. 



그는 한국은행 본점을 비롯해 조선상공회의소, 숙명여고, 예산 · 군산 · 대구 등의 은행지점을 설계했다. 그 당시 저항운동과 관계된 종교집단의 경우 일제의 방해로 건축허가가 연기되고 규모가 축소되는 등 건립이 순조롭지 않았다. 이에 일본의 감시와 억압을 피하려고 일본인 설계자 나카무라 좋아야 이와 공사감독 후 루타니 도라 이치(古谷虎市)를 선정했다고 천도교 측은 설명한다. 도시의 건축물은 삶의 무대이고 삶의 기록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와 함께도 시의 건축물은 시각적인 대상으로 서도 시 미학적 의미를 지닌다. 도시 미학적인 관점은 도시형태구조 혹은 도시공간 구조를 포함한다. 또 하나, 도시의 건축물은 문화적 활동과 경제적 생산의 중심시설로서 문화 경제적 의미가 있다. 


건축물의 도시적 가치를 탐구하는 그것은 역사적 의미, 미학적 의미, 문화 경제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회사령›은 1910년 12월 29일제랑(制令) 제13호로 제정되어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다가 1920년 4월에 폐지됐다. 일제는 회사령을 통해 총독부가 회사의 설립과 활동 전반에 간섭하는 것을 제도화했다. 1920년대는 일본의 회사령이 폐지되고, 민족적 건설업자 인정 세 권 이 북촌에 ‘건양사’를 설립해 북촌 일대를 개발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천도교는 송현동에 있던 총무를 경운동 88번지 일대로 이전해 중앙대교당을 새로 짓기로 했다. 3 · 1운동의 거사 지인 탑골공원이 지척에 있고, 조선 시대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와 언덕을 사이에 둔 곳이었다. 윤치오 소유의 경운동 88번지 대지를 2만 원에 매입하고 그 인근 대지를 더 매입해 모두 1,824평을 마련했다. 그리고 1918년 12월 1일 교일기념일(현도기념일)에개기식(開基式) 을거행했다. 



건립을 시작한 장소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인 지역이다. 길 건너편에 운현궁이 있고 주한일본 공보문화원도 멀지 않다. 중앙대교당 자리는 종교건물이 아니었다면 작금의 개발압력에 따라 무엇으로 변했을지 알 수 없는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이다. 한점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일본 공보문화원의 서쪽 건너편, 천도교 중앙대교당 조금 북쪽에 있던 아랍문화원은 상업적으로 개발되어 서원빌딩이라는 대형사무실빌딩이 되어버폈다. 역사적 의미를 발굴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도 시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960년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탑골공원 사이에 역사적이 고도시적인 연결을 깨뜨리는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이 생겼다. 바로 낙원상가이다. 당시 서울시는 안국동에서 종로를 남북으로 관 통행한 남동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도로 예정지에 낙원시장이 있었고, 도로를 개설하려면 철거가 불가피했다. 서울시는 시장상 인들과 협의한 끝에 시장을 철거하고 도로를 개설하되 도로 위에 상가와 아파트를 건설해 상인들을 입주시키기로 했다. 시장상인 대부분이 이상 가에 입주했고, 상인조합은 낙원상가 주식회사를 창립해 건물을 운영하게 되었다. 원래이건 물은 8층으로 허가받았지만 15층까지 불법적으로 올렸다. 





건물이 도로 위에 위치하다 보니 상가 밑돌로는 어둡고 음침했고, 복잡한 구조 때문에 화재에 취약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문제를 무시하고 결국 양성화됐다. 정권이 바뀌고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철거 논의 가수 없이 반복됐지만, 낙원상가는 여전히 남아서 시각적으로 위압을 행사하는 건물로 우뚝 서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근대 초기에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 비슷한 시기인 1926년에 완공된 조선총독부는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eV Heritage) 로거론되면서정치적인결정에 따라 1995년 광복절에 철거되기 시작됐다. 명동성당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건립연도는 20년 가까이 차이가 맨땅만도 건물 모두 붉은 벽돌을 외관의 주재료로 사용했다. 

명동성당은 종탑을 중심으로 위계가 있는 뾰족한 첨탑이 지붕을 이루고 있고,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사각의 돔 위에 단일 첨 두를 이고 있다. 양식적으로도 독특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78년에서 울 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됐다. 중앙대교당의 절충된 양식은 학자나 언론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서술된다. 고딕과 르네상스를 절충한 양식으로 보기도 하고, 고딕과 바로크양식을 접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부 학자는 설계자인 나카무라 요 시 안녕 가 그의 사무소에 근무하던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안톤 폐 러의 영향으로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서 유행하던 빈 분리파(Vienna Secession) 양식을 접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세기에 고착된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며 등장한 빈 분리파는 신예술 양식을 발전시킨 클림트, 바그너 등이 주축을 이룬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면은 수직적으로 하부에 교당 몸체, 중간부에 둥근 조망 창을 가진 사각 타워, 상부에 사각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의 어울림은 분포와 구성에서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화강석 부분에는 장식적인 조각이 들어있다. 상부로 오르면서 체감률이 높은 비례를 갖는 독특한 형태를 띠지만, 그 비례가 아름다워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붙든다. 정면이 대칭을 이루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미적 경험을 하게 한다. 수운회관은 1971년에 건립됐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옆에 있던중앙총부를 1969년에 우이동 봉황각 옆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최제우의 호를 딴 수운회관을 세웠다. 건립을 추진한 사람은 최덕신이다. 최덕신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당시 학생이었던 박정흰 전 대통령을 알게 됐다. 5 · 16 군사쿠데타를 지지해 주도 세력으로 참여했고, 이후 외무부 장관을 지내는 등 박정희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아버지 최동오를 따라 천도교인 이였던 최덕신은 1967년 교령을 맡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대통령선거에서 천도교의 표를 얻고자 수운회관을 지어준 것이라고도 한다. 최덕신은 그가 주서독대사로 있을 때 발생한 동백 림(東伯林, 동베를린) 사건의 배후로 거론되기도 했다. 천도교 교령 재선에서 박정희 정부의 지원이 미흡한데 불만을 품고 정권과 멀어졌다. 1976년 미국에 이민한 최덕신은 박정희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비난하면서 완전히 척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고 6 · 25전쟁 때 월북했던 유동렬의 딸인 아내 류미영과 함께 1986년 북한으로 들어간 최덕신은 북한의 천도교청우당을 맡아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최근에는 그의 아들 최 씨인 국이 북한에 영구 귀국하겠다며 평양으로 갔다. 최덕신이 교령이었을 당시 전횡이 심해 천도 교인들의 숱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역설적이냐 개의 영향력으로 지어진 수운회관은 오늘날 천도교존립의 중요한 자산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침략과 강점, 군사쿠데타와 독재, 남북 분단이라는 근대사의 굴곡기한종교인 가족에 투영된 것이다. 수운회관의 설계자는 정인국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의 건축적 관계를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일종의 본부인 수운회관은 고전적인 양식의 중앙대교당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자체건물을 근대적 스타일로 드러내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 도시적 문맥의 조화라는 이론을 적용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도시의 건축물은 도시적 가치의 유일한 선택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철거와 변형, 보전과 유지도 단일한 척도를 적용해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건축물의 품격을 높이고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은 쉽지 않다. 모든 건축물은 그와 관련한 문화적 총체의 결정물이다. 누군가가 쉽게 이끌고 주도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설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나 단체이다. 우리는 건축주의 의지가 욕구와 병행해도 시적 가치를 갖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건설행위는 역사적 의미, 미학적 의미, 문화 · 경제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도시행 위이기 때문이다. 건축주의 능력과 의지로 시작된 이후에도 많은 관계자가 관여한다. 설계자, 행정제도, 역사가, 건축 도시전문가, 비평가가 관여한다. 공공적인 건축물은 물론이고 단체와 기업, 개인적인 건축물도 도시적 장소이고 또한 시각적인 대상으로서 도시구성물이므로 시민은 모든 건축물의 평가자이면서 건축행위의 참여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