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7] 강진 명발당과 소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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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명발당 (明發堂)과 소대정(小坮亭)


이관직


해남과 강진은 개인적 인연이 많은 곳이다. 나는 결혼해서 첫 여행을 광주에서 시작해서 남도 몇 곳을 다녔다. 해남은 내 아내의 고향이고 강진은 그녀의 외가이다. 한국건축사를 공부하면서 이름을 외워야 했던 몇 개의 조선 초기 주심포(공포를 기둥 위에만 배열한 것을 주심포형식 柱心包形式 이라고 부른다.) 건축물이 그 주변에 있다. 1476년(성종 7) 이전에 지어진 무위사 극락보전은 강진 성전면에 있다. 


그보다 150여년 전의 지어진 수덕사 대웅전의 양식과 조형을 계승했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영암에 있는 도갑사 해탈문은 1473년에 중건되었다. 다포식 건축물이 많아지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주심포 계열 건물이다. 겸사겸사 여행 일정을 짰었다. 모란꽃이 한창인 계절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생가도 들렸다. 방문 기록책에 이름도 올리고 한참을 모란꽃을 바라보았다. 


근래 들어 여러 번 강진을 다닐 기회가 있었다. 나무로 가구공예 작업을 했고, 소설을 쓰는 친구가 강진 도암면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두 번 아내와 함께 들려서 강진만이 바라보이는 그의 집에 머문다. 경기도 북부 출신인 그는 강진 자신의 집이 한겨울에도 춥지 않은 곳이라 좋다고 한다. 강진은 여러 가지로 풍요로운 곳이지만 무언가 애틋한 느낌을 준다. 시인의 뚝뚝 떨어져 버린 모란 때문일까? 유배살이로 인생의 3분의 1을 보낸 정약용을 보살피던 남당사(南塘詞)의 주인공 혹은 홍임 모(母)때문일까? 



강진을 스스로 유배지로 택한 친구는 몇 사람 건너 소개를 통해서 강진에 사는 윤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만났다. 윤선생의 본관은 해남 윤씨였고, 조선 중기 관료로서, 학자로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산 윤선도, 그의 증손으로 문인화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와 본관이 같다. 그 친구는 작업장과 집터를 찾기 동안에 윤선생이 살면서 관리하는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반년을 넘겨 강진과 해남 부근에 적당한 땅을 알아보다가, 기거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산언덕에 터를 잡았다. 땅을 다듬고 직접 설계하고 시공해서 정착했다. 그의 집 거실에서는 숲 사이로 멀리 강진만이 바라보인다. 


그가 신세 지고 살았던 곳은 ‘명발당’이라는 당호가 있고 작은 정자가 딸려 있는 집이다. 이 백년이 족히 넘은 세월을 버티고 이어져 내려온 집이다. 한때 도암 항촌의 해남 윤씨 항촌파 본가로 규모가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명발당으로 불리는 일자형 집 한 채 그리고 사랑채를 대신했을 것 같은 소대정이 남아있다. 마을 주민 중에 해남 윤씨가 3분의 1이 넘는다고 한다. 명발당 본채는 여기저기 벽돌로 보완하고 지붕 끝에 함석 챙을 단 모습이 되었다. 어찌 보면 소박한 일자형 생활한옥의 살림집으로 보인다. 골목을 들어서면서 길가와 밭 경계에 심겨 있는 파초가 인상적이다. 

 

명발당에서 두 집안의 혼인


200년전, 1812년 이곳에서 결혼식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내려올 때 셋째 딸은 7살이었다. 아버지와 떨어져 살면서 18살된 그녀와 명발당을 건립한 집안의 자손인 윤창모(윤영희로 개명)의 혼인이다. 해남 윤씨 항촌파 본가의 결혼식이지만 신유사화로 폐족의 길을 걷고 있는 유배자와 사돈을 맺는 혼인이 마냥 축제 같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발당은 윤창모의 고조가 되는 윤홍좌(1686-1738)가 건립했다고 한다. 


그의 손주인 윤광택은 성실함과 수완으로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그와 정약용의 아버지인 정재원과 절친한 사이였다. 정재원의 부인 윤소온은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의 손녀이다. 정약용은 명발당을 중심으로 해남 윤씨와 깊은 인연이 있다. 정약용의 외가는 윤선도와 윤두서로 유명한 어초은파 해남 윤씨이고 셋째 딸과 혼인하는 도암 지역의 집안도 해남윤씨인데 항촌파이다. 윤광택은 도암 지역에서 가계를 크게 일으킨 항촌파의 중흥조이고 그가 태어난 집이 할아버지 대에 자리 잡은 명발달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죽은 사람을 살려준 은인이라는 뜻으로 정약용은 아버지의 친구인 윤광택을 해룡공(海龍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윤광택은 빈손으로 갑부가 되었다. 해남의 좌일포와 상공리에 바다를 막아 간척하여 농토를 늘렸다. 조부의 묘를 강진 도암에서 해남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하면서 해남 상공리 마을 주민에게 서당을 3년간 무료로 열고, 이장 후에 80 두락(마지기)의 간척지 논을 기부했다. (윤동욱의 ‘다산의 인연으로 본 명발당과 조석루’에서 일부 인용) 윤광택은 친구가 된 화순현감 정재원이 해남으로 처가를 방문할 때면 자주 만나 우정을 나누었다. 


윤광택의 아들 윤서유와 정재원의 아들 정약용도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들의 자식 대에서 혼인으로 사둔 집안이 되었다.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와 정약용의 3녀가 명발당에서 혼인을 하게 되었다. 1813년 윤창모는 혼인 후 임신 3개월의 아내와 함께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윤광택의 증손이면서 정약용의 외손자가 되는 그들의 아들인 윤정기는 정약용이 해배되어 양수리 부근 경기도 마재로 올라간 후 정약용에게서 학문을 전수받고 그 뒤로는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에게 배웠다. 윤정기는 정치적으로는 몰락한 남인으로 출세를 하지는 못했지만 정약용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업적을 남겼다. 


윤창모가 경기지방으로 이사한 후 명발당은 집안사람에게 팔게 되었고 여럿을 거쳐 지나온 것을 2007년 윤광택 문중에서 다시 구입해서 관리하고 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소설을 쓰는 친구가 신세를 진 윤선생은 해남 윤씨 문중 사람이다. 윤선생은 얼마 전 사고로 세상을 뜨고 다른 사람이 관리하게 되었다. 명발당은 다시 전체적으로 보수가 되어 깔끔하게 되었다. 


명발당을 중심으로 이백 년을 넘게 이어온 집주인과 관계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집은 사람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속에는 이름이 생기고, 이름이 이어지고,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다시 이야기에 중심이 된다. 이름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름 없이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조선 시대 이야기 중에는 여자의 이름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의 경우 족보를 토대로 연구될 수밖에 없는데, 가문의 족보에 여자의 이름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었다. 해남윤씨의 족보에는 남녀가 평등하게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특이한 것이다. 


‘해남윤씨 족보 목판’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족보는 부계는 물론 모계가지 모두 기록하고, 자녀를 남녀순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서로 기록하고, 외손까지 남기고 있다고 한다. 장약용의 아버지와 결혼한 윤두서의 손녀 윤소온의 이름을 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유배생활 중인 정약용에게 혼인 때의 다홍치마를 보냈던 부인은 이름 없이 풍산홍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보낸 치마는 유배 상태의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주는 인생의 교훈을 적은 그 유명한 ‘하피첩 (霞帔帖)’으로 만들어졌다. 남은 치마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 그려졌다. 유배를 올 때 7살이었던 딸,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딸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친구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될 때, 시를 적고 매화나무 꽃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있는 그림을 그려준다. 이른바 매조도 혹은 매화쌍조도라 불리는 그림이다.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명발당의 건축


200년이 넘은 세월을 거치면서 명발당은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만큼 수많은 변형과 개축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남아있는 유물로서가 아니라 생활하는 장소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본채는 서향으로 전면 6칸 일자집이다. 생산 터인 논밭을 바라보는, 조금은 높은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같은 해남윤씨 본관이지만 어초은파의 윤선도 고택 녹우당이나 운두서 고택에 비하면 항촌파의 중흥조 윤광택의 집은 규모와 격이 떨어진다. 담장도 대문도 행랑도 없다. 고택이라 불리지도 않는다. 당호가 적힌 현판도 없다. 그렇지만 당호만은 당당하다. 윤광택이 명명한 집의 이름은 ‘명발당(明發堂)’이다. 효성스러운 마음이 드러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건물을 바라보면서 오른쪽 즉 남측 두 칸은 안방이다. 



안방 영역 길이로 반을 갈라 동으로 면한 뒤쪽은 부엌이다. 대청마루와 안방 영역 사이에 가운데 방이 있다. 가운데 방과 대청 두 칸은 마당에 면해서 퇴칸이 있다. 본채 왼쪽 즉 북측 한 칸은 건너 방이다. 역시 안방과 비슷하게 뒤쪽 동측은 아궁이를 겸한 작은 부엌이 있다. 부속채 없이 살림을 나누어 써야 하는, 더부살이를 수용하기 위해서일 것 같다. 건물을 바라보고 오른 편에 있는 정자가 사람의 시선을 끈다. 1798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1958년 중건했다는 기록이 상량에 있다. 


명발당 본채를 안채로 생각하면 정자는 사랑채처럼 쓰였을 것이다. 정면 세간 집이다. 두 칸은 마루이고, 북측 한 칸은 방을 들였다. 인터넷에서 보여지는 사진들에 의하면 북측과 서측에 미닫이 유리 창문이 보인다. 이번 여행에서 확인한 것으로는 북측 마당으로 난 창은 없어지고 서측은 작은 쪽창으로 고쳐졌다. 여행자를 위한 숙소로 전환한 개조인지, 원형으로 복원한 것인 궁금했다. 정자는 날아갈 듯 펼쳐진 지붕과 기둥이 좋은 비례로 어울린다.  


마을을 향해서 개방적인, 열려 있는 서향의 일자집. 원형이 남아있지만 낙수받이 챙까지 달고 있는 생활하는 집인 명발당. 그 집에서 윤광택이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할아버지 산소 자리를 해남의 명당자리로 옮기면서 애를 쓴 집안은 안타깝게도 후 4대째 윤정기에 이르려 자손이 끊겼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이름과 터와 건축물이 남아있다. 다행스럽다. 남아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이름이든, 이름과 연관된 장소든. 사소하고 적은 자료들이라도 기록에는 이름이 적혀 있고 사건이 있다. 기록을 통해서 장소는 이야기로 살아나고,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 소통하고 공감한다. 


그 과정에는 오류도 있다. 또한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강진을 다녀온 후 그동안 모은 자료와 이야기를 스케치로 엮어 보려 한다. 실측자료나 도면이 없는 명발당을 정확하게 되살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배치도를 겸한 평면도는 반년 넘게 그곳에서 살았던 소설 쓰는 친구의 스케치를 정리한 것이다. 명발당은 2009년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32호로 등록되었다. 안내판이 본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자 앞에 있다. 본채보다 정자가 문화적 가치가 더 있다는 것인지, 정자만 등록된 유산인지 알 수 없다. 


생활양식의 변화와 문화의식의 변화로 과거의 것들은 기능을 잃어간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기능’이다. 또한 생활 속에는 문화적 가치가 담겨있다. 문화는 삶을 풍부하게 여유를 갖게 한다. 기능을 잃은 것도 그 안에 문화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기록과 보전 노력으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노력으로 찾아낸 문화적 가치는 삶을 다양하게 하고 삶을 즐겁게 할 것이다. 

 

2021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