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4] 성장과 발전, 화합과 민주의 역사를 간직한 세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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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발전, 화합과 민주의 역사를 간직한 세종로

이관직



기억 속 나의 유년 시절은 종로구 계동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바뀐 재동국민학교를 다니면서 계동에 살았었다.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집 앞 골목과 계단들이 마당이고 놀이터였다. 승용차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대문 옆에 연탄을 쌓아 두는 광이 딸린 화장실 건물이 있고, 빨래를 널 수 있는 작은 평지붕에 연결된 가파른 계단이 붙어 있었다. 수돗가를 겸하는 마당은 정말 손바닥만 했다. 율곡로에서 북악산으로 북촌은 꼬물꼬물 아이 손가락 모양으로 뻗은 골목마다 디귿자, 미음자의 도시형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언덕 마을을 이룬다. 


창덕궁 서측 원서동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계동, 재동, 가회동, 안국동, 삼청동이 경복궁까지 이어진다. 친구들과 함께 삼청공원의 산속을 수없이 누비고 다녔다. 배고프던 시절이라 봄 산에 올라 혀바닥과 입 전체가 새까맣게 되도록 콩알만한 버찌를 얼마나 따먹었던가. 방과 후에 서쪽으로 멀리 경복궁과 중앙청까지 진출하고, 동으로 능선을 넘어 창덕궁 뒤로 성북동에 이르곤 했다. 그 60년대에, 나중에 보니 1968년에 중앙청이라 부르는 화강석의 거대한 건물 앞에 광화문이 지어졌다. 섬세한 서까래가 날개처럼 펼쳐진 지붕을 받치고 있고 현란한 단청이 칠해져 있었다. 한글로 쓰여진 광화문이라는 낯익은 글씨의 현판도 달려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콘크리트 광화문이었다. 


가.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은 서쪽에서 오는 사직로와 남측 시청 방향의 세종로가 만난다. 광화문 앞 도로는 전임 서울시장 시절, 세종로의 오래된 상징이었던 100년 된 은행나무 28줄을 뽑아버리고 넓은 가로 광장이 조성되었다. 한때 선거 공약으로 이슈화되면서 반대 후보자에게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온갖 집회가 날마다 열리고 해외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유명한 광화문 광장이 되었다. 또한 촛불혁명의 거점 장소로서 새로운 민주주의 역사를 연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제 광화문 광장은 국가거리, 국가광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또 다른 상징화의 과정에 있다. 일제 강점기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 흥례문 자리에 식민통치의 중심시설로 조선총독부가 건축되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경복궁의 종심 축을 따르지 않고 조금 동쪽으로 틀어서 건축되었다. 총독부 전면은 광장이 조성되었다. 일제가 조선의 정통성을 폐기하면서 의도적으로 튼 배치의 각도는 5.7도, 5.6도, 3.75도, 3.6도 등 학자와 언론마다 조금씩 다르다. 



중앙청은 철거와 보존, 이전 등의 논란이 많았던 중앙청은 1995년 김영삼 정권 시절에 폭파 이벤트로 철거되었다. 광화문은 경회루의 수평 축에 맞추어 건춘문 위쪽 동쪽 담장으로 이전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전된 광화문은 6.25전쟁으로 기단만 남고 파괴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1968년, 조선 총독부가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시절에 기존 건축물에 근거해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본래의 자리가 아닌 안쪽에 자리잡게 되고 각도도 총독부의 축에 맞추어 지어졌다. 2006년, 콘크리트 광화문은 철거되고 2010년 목조로 복원되었다. 1920년대 말, 경복궁 담장의 동쪽 모서리에 있었던 동십자각은 도로 선형에 따라 담장이 축소되면서 길에 홀로 서게 되었다. 동십자각 북쪽으로는 삼청로가 연결된다. 동쪽으로 이화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율곡로가 이어진다. 1932년, 율곡로는 창덕궁과 종묘를 도로로 갈라놓으면서 조선의 정통성을 침탈을 위해 건설되었다. 오랫동안 골짜기와 같은 모양의 율곡로 종묘 구간은 2019년 터널화 완공을 앞두고 있다. 



나. 국가라는 상징


국가라는 개념도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권이 없던 때와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시대는 정말 다를 것이다. 왕국에서 제국으로, 그리고 식민지에서 광복 국가로 독립했다. 국가 이념도 경제 성장에서 국민 복지로 바뀌고 있다. 자유와 민주라는 개념도 변하고 있다. 경복궁에서 시청에 이르는 세종로는 우리 국민의 지난한 삶, 좌절과 모욕을 극복하고 성장과 발전, 화합과 민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광화문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정부청사, 역사박물관, 외교관, 미국대사관, 문화회관, 통신회사, 보험회사, 사무실빌딩, 신문사, 호텔, 시의회, 박물관, 시청사가 거대한 규모로 길 양쪽에 도열해 있다. 경제, 산업, 문화의 대표적인 국가급 시설들을 골고루 뽑아 놓은 것 같다. 우리의 도성과 읍성은 서구의 도시와 다르다. 



광장이라는 개념의 도시공공 공간이 없었다. 광장은 서구의 도시적 공간이다. 광장을 이루는 요소는 주변의 길로 연결되는 평면형태 그리고 둘러싸고 있는 건축물들의 형태와 크기, 그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역사이다. 최근에 광화문 광장을 새롭게 조성하자는 논의가 뜨겁다. 조선의 관공서 거리였던 육조거리가 도시적 의미의 광장으로,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거리가 되었다. 어느 현상학자는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고 정의했다.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모든 상징은 무엇에 대한 상징이다. 이때 무엇은 국가나 도시 등의 체제나 형식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 자체도 아니다. 상징의 대상이 되는 무엇은 구성원들이 경험한 사건을 통해 얻은 반성, 체제가 추구하는 지향과 같은 의미와 정신일 것이다. 장소와 공간의 상징성은 의미와 정신이 깊이를 가질 때 스스로 생겨나고 쌓여갈 것이다. 국가의 격이 옛 역사 속 왕권국가의 정궁 앞에 광장을 잘 만들었을 때 생겨나는 것일까? 



왼손잡이처럼 오른 손으로 장도를 들고 옛 영화 속에 나오는 어색한 갑옷을 입고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과 거대한 크기에 금분을 입힌 세종대왕의 동상은 광화문 광장을 억지로 국가 상징으로 만들려는 과장된 모습이다. 근대사의 명암을 간직한 조선의 육조거리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근자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중앙청 앞에 은행나무와 차들만 가득했던 거리였다가 이제는 사람이 몰려드는 광장으로 변신했다. 도시는 계획가의 구상과 도시적 기능이 상호 복합적으로 결정되면서 변해간다. 계획가는 정치적 결정과 행정적 실행을 도구 삼아 상징이라는 언어로 포장해서 자신의 구상을 실현한다. 로마의 도시들은 도시를 지탱하는 정치력을 상실했을 때 한 순간에 사라졌다. 도시적 기능은 생업도시로서 자본 순환과 교통 효율, 문화도시로서 소통의 확장과 시각적 기억이다. 도시적 기능은 사람들의 개별적 욕구가 복합된 것으로 도시를 풍요롭게 하는 도시의 또 다른 힘이다. 



다. 경성부청사에서 서울시청사로


지금의 서울 시청사는 일제강점기 1926년 준공된 경성부 청사를 증축한 것이다. 해방 후 서울시청사도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찬가지로 보존과 철거 논란이 반복되었다. 세계적인 대도시의 행정과 민원은 늘어나는데 시청 본청은 턱없이 좁아서 여러 곳에 분관을 두고 업무를 수행했다. 여러 번의 현상 설계와 시행 보류, 중단이 반복된 끝에 지금의 시청사가 탄생했다. 서울시청사는 2005년 아이디어 공모전 이후 설계시공일괄입찰(턴키)을 통해 <삼성물산컨소시엄: 삼우 + 희림 + KMD>의 당선안을 선정했지만, 세 차례에 걸친 문화재 심의 부결, 조건부 통과(4차) 및 보류(5차)를 거쳐 수정과 보완을 거쳐 설계가 진행되었다. 여러가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진행된 설계안은 상징성과 조형성 부족이라는 디자인 논란으로 원점이 되었다. 이에 2008년 삼성컨소시엄은 유걸, 



DMP(박승홍), 매스스터디스(조민석), 류춘수 네 건축가의 지명공모를 통해 새로 안을 받기로 하고, 그 결과 건축가 유걸의 안이 당선되었다. 턴키에 당선된 설계자와 시공자가 결정되어 있어 있는 상황에 기본 설계안은 또 다른 건축가가 계획을 하게 되었다. 신청사는 완공되었지만 디자인은 시민과 전문가 눈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금은 서울광장이라고 부르는 시청 앞 광장의 현상설계 진행도 심각한 행정 모순을 가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을 통해서 우리나라 시민들 속에 내재한 몰입과 단결, 열정의 폭발을 경험했다. 서구적 광장의 개념이 없었던 시민 문화속에 소통과 분출의 장소로서 광장을 경험했다. 곧바로 착수한 현상설계에서 서현 건축가의 ‘빛의 광장’ 안이 당선되었다. 실시설계가 진행되었지만 조급한 시행과 예산 초과로 설계는 중단되고 지금의 잔디광장으로 진행되었다. 선출직 지자체 장이 임기중에 완성해야 하는 토목 건설 사업은 급조된 시행을 하게 되고 태생적인 자기 모순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술은 시대정신을 표현한다. 이때 정신은 일종의 눈이다. 세상을 돌아보는 눈, 세상을 관통하는 눈, 세상을 이끄는 눈이다. 정신은 반성하고, 직관하고, 멀리 본다. 근대건축의 이론가이면서 비평가인 기디온은 건축도 그러한 시대정신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건축의 정신은 무겁다. 기술을 등에 지고 시민들과 손을 잡고 정치를 수용해야 한다. 건축물은 땅에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축적이고 오래 가지만 다행이 신이나 판도라의 상자처럼 영원하지는 않다. 반복되고 순환되기에 실패와 시행착오를 개선하면서 조금씩 치유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라. 도시를 즐기고 도시의 즐거움을 누린다.


나는 답답하고 슬픈 마음이 생기면 거리를 걷는다. 도시를 걷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보는 풍경을 느낀다. 도시의 풍경 속에는 어느 곳이나 사람이 있다. 안국동에서 언덕을 넘어 광화문으로 내려오면 동십자각이 보인다. 캔틸레버가 흥미롭게 튀어나온 ‘난스튜디오’ 수십년 동안 십자각을 바라보고 있다. 건널목을 건너 명동칼국수 건물 앞 경복궁 버스정거장에 잠깐 앉아본다. 북서 방향 대각선으로 비교적 잘 생긴 각도로 광화문이 보인다. 인왕산의 능선이 예사롭지 않다. 자동차들이 줄 지어 지나간다. 잠깐 스케치를 한다. 도면도 없이 목수는 저토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드는데 우리의 계획은 왜 날마다 실패할까? 허튼 생각을 밀어 놓고 태평로를 따라 걷는다. 기억나는 현상설계로 당선된 두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서측에는 1978년 완공된 세종문화회관, 엄이건축 작품이다. 동측에는 2012년 리모델링 완공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정림건축 작품이다. 조선시대 예조가 있던 자리에는 미국대사관이 있다. 광화문 사거리에는 일본주미대사관과 똑같이 설계해 달라고 시저 펠리에게 의뢰했다는 교보생명 광화문 사옥이 우뚝 버티고 있다. 외롭게 남겨진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서울 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 속칭 비각(碑閣)이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세운 기념비이다. 길 건너엔 국제극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거대한 오피스 빌딩이 되어버렸다. 광화문 사거리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면 일민미술관과 신문박물관이 들어있는 옛동아일보사옥과 함께 동아미디어센터가 있다. 바로 동측으로 복원된 청계천이 열린다. 시작점에는 인도양에서 서식하는 다슬기를 상징한다는 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샤 밴 브룽겐의 공동작품인 스프링(Spring)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파이넨셜센터와 국제호텔을 지나면 견고한 모습의 한국프레스 센터가 있다. 그리고는 생뚱맞은 형태의 서울시청신청사가 좁은 골목에 등을 대고 있다. 길 건너에는 근대건축의 고전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는 서울시의회건물이 있고 조선총독부 체신부 건축을 철거하고 지은, 낮게 깔린 서울도시건축전시관 너머에 아름다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보인다. 



도시를 즐긴다. 가벼운 즐김이 있고 깊이 있는 즐거움이 있다. 도시는 생활하는 곳이고 누리는 곳이고 즐기는 곳이고 삶을 담는 곳이다. 슬픔, 기쁨, 안타까움, 의미, 절망, 희망, 좌절, 극복, 유예... 우리는 매순간 느낀다. 느낌이 열리고, 도시가 보이고, 도시와 연결된다. 도시는 역사가 있다. 사람들의 역사가 골목에 건물에 궁궐에 성곽에 있다. 도시를 즐기는 것은 도시를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이 번져 나간다. 오늘에서 어제로, 백 년 전으로 질러간다. 아픔이 있었던 역사가, 혁명이 있었던 시절이 살아난다. 개인이었다가, 우리가 되고, 만보객 이었다가 비평가가 된다. 걷는 자였다가 드론을 타고 도시를 내려다본다.


2019.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