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1] 명동성당과 명동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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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명동

이관직


서울 명동은 근대기 이후 가장 번화한 곳이다. 계절과 날씨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쇼핑으로, 관광으로, 사업으로 명동을 찾는다. 대학시절 서울의 동서에 있는 두대학의 체육 행사가 끝나고 어느팀이 이겼든 상관없이 수십, 수백명이 명동에 모여서 축제의 여흥을 즐겼다. 골목골목 누비며, 반기는 술집에 들려서 대학생의 특권을 만끽하기도 했다. 뜨거운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얹은 비엔나 커피를 처음 마셔 보았던 곳도 명동 어느 골목이었다. 아이스크림과 뜨거운 커피가 섞이며 낯선 맛이 입으로 침입하는 느낌은 뜨겁고 낯선 이국 문화의 충격이었다. 가장 눈에 띠는 랜드마크는 명동성당이다. 카톨릭 영세 전 수업 과정으로 예비자 교리 학습을 같이 가자는 친구를 따라서 처음으로 명동 성당을 갔었다. 늦은 저녁, 짙은 푸른 색 하늘을 배경으로 어렴풋하지만 웅대한 건물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높은 첨탑, 벽돌을 여려 겹 접어 깊게 만든 포치 입구, 일꾼들의 꼼꼼한 손으로 수많은 시간 동안 쌓아 올렸을 벽돌들. 그 후에도 여러 번 보았지만 언덕위의 명동성당은 섬세하면서도 한결같이 당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명동을 기억하는 또 하나가 음악이다. 음악감상실에서 포크송과 팝송을 듣던 추억이 있다. 명동 성당을 다니던 친구와 연극을 하나 보았다. 에디뜨 삐아프의 역을 윤복희 가수가 맡은 ‘빠담 빠담 빠담’이라는 연극이었다. 아마 뮤지컬이었을 지 모른다. 안양에서 연극을 연출하던 친구의 무대 세트를 도와주던 때나 대학 극회의 무대미술을 맡아서 세트를 만들고 무대 배경 그림을 그리던 분위기와는 너무도 달랐던, 화려한 상업극이었다. 강렬한 샹송, 섬세한 무대, 극적인 전개에 감동했었다. 


명동의 거리는 밤이면 온갖 네온이 번쩍거리고 골목마다 독특한 외제 물건들이 넘실거렸다. 뒷골목은 좁고 어둡고 정신없이 복잡하고 공포스러운 험한 분위기였다. 지금의 명동은 세계적인 케이팝 분위기 속에 우리 것을 찾는 외국인이 거리마다 가득하지만,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찾던 곳이다. 도시는 변화한다. 명동과같은 높은 밀도의 구도심은 신축 개발이 쉽지 않다. 여러 필지를 합해서 개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경제적 효율을 찾을 수 있지만 잘게 나뉜 소규모 필지들은 현행법으로는 예전의 건폐율과 용적율로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없다. 외장을 고치거나 건물의 성능개선을 위해서는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동 일대는 수많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끝없이 아이템이 바뀌며 리모델링을 거듭하던 코스모스백화점과 같은 건물은 예전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다.       



명동성당,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명동성당은 남산 북사면 아래부분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구릉지에 위치한다.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카톨릭 성당의 자리이다. 조선시대 명동 일대는 명례방(明禮坊)에 속한 종현(鐘峴)이라는 지명이었다. 이 곳은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원각사의 종을 옮겨온 이후 북달재 혹은 종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1784년 카톨릭 신자들이 모여 명례방에서 신앙공동체를 결성하고 1882년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교구장 블랑(Marie Jean Gustave Blanc)이 부임하여 1887년 대지매입을 시작했다. 첨탑의 뾰족한 형태가 풍수상 좋지 않고 경복궁을 마주보고 위압하는듯 한 배치 문제로 조선정부와 5년여 분쟁을 치루고 1892년 8대 교구장 귀스타브 뮈텔(Mutel) 때 정초식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 위젠느 장 죠르쥬 꼬스트(Engene Jean Georges Coste, 高宣善, 1842~1896) 신부에 의해서 설계와 시공이 진행되다가 1896년 사망후 포와넬(Poisnel)신부에 의해서 마무리되었다.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성당 축성식을 갖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교회의 평면은 라틴 십자형(十字形)이고 신랑(Nave) 양쪽에 측랑(Aisle)이 있는 삼랑식(三廊式)의 고딕형이고 십자형 교회의 팔에 해당하는 부분에 익랑(transept)이 붙어있다. 역사적으로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첫 고딕 양식 건축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 초창기에 서구 중심의 문화우월적 태도가 있었고 교세 확장과 교회의 안전을 위해 당시 권력자인 일본에 유화적이었다.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준비를 알게 된 뮈텔 주교 신부는 일본과의 좋은 관계의 유지를 위해 관련된 조선인을 밀고했고, 수많은 카톨릭 신자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근대건축 중 서양의 고딕성당의 요소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럽의 완성된 고딕양식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술적 문화적 상황 특성에 맞추어 한국적 문화를 수용한 건축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서쪽에 입구를 두고 동서향으로 배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서양의 고딕 건축과 달리 지형과 진입로에 따른 주변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정북에서 30.5° 서쪽으로 기울어진 입구를 지니고 있어 남북배치에 가까운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지어질 당시로 보면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세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명동 성당의 배치를 동양의 세속적 전제 권력과 대립하는 서양의 신성권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해방이 되면서 종현대성당이었던 이름을 명동대성당으로 바꾸었다. 서울 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며, 명실상부한 한국천주교의 상징이다. 해방 후 70년대와 80년대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의 중요한 보루가 되었다. 서양에서 교회가 성소로서 무력에 대한 치외법권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명동성당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적극적인 중심지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국가 종교의 상황에서 피난처로 정치적 피해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사와 집회, 선언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 있었고, 강압적인 체포에 대해 방패가 되었던 곳이다. 1972년 12월 유신헌법 반대 크리스마스 미사, 1976년 3월 민주구국선언, 1987년 2월 고 박종철씨 추모식, 그해 6월 민주항쟁 기념 미사 등으로 명동 성당은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식 벽돌조의 고딕 성당


명동 성당은 아름답다. 첨탑과 교회의 몸체가 기둥과 부축벽(버트레스Buttress)으로 지지되고 있다.분절된 벽마다 뾰족한 윗모서리를 가진 스테인드글라스 창들이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형태와 재료들이 아름다운 고딕적 비례와 섬세한 결구를 보여준다. 성당 내부 공간이 주는 숭고한 감동은 많은 미술가와 비평가들이 고딕의 공간과 빛의 효과에 대해 논했던 것 이상이다. 문학과 미술이 끝없이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사람이 느끼는 숭고미의 경계가 확장되었지만 직접 겪게 되는 놀라운 성당 내부의 공간감은 그러한 언어화된 감동과는 다르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시선은 평면상 깊은 종심의 끝에 있는 제단까지 뻗어간다. 


깊숙하게 전개되는 투시적 공간감에 빠져든다. 제단 뒤 둥근 후진(에입스Apse) 하얀 벽은 조금 돌출된 벽돌 기둥에 의해 다섯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면은 두 개씩의 세로로 긴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화려한 색유리 스테인드글라스의 세로 창을 따라 시선은 위로 향한다. 기둥들은 아치의 리브가 되어서 뾰족한 모양으로 천장에서 만난다. 반원형 둥근 벽으로 둘러 쌓인 제단 공간은 성당 공간의 핵심이다. 화려한 빛깔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햇빛은 여러 색으로 발광하고 확산되면서 내부 공기와 섞여 고딕 성당의 높고 깊은 공간을 종교적 분위기로 변화시킨다. 빛은 공간이고, 공간은 빛이다. 주랑과 측랑 사이에 반복되는 피어 기둥으로 평면 공간은 더욱 깊어 진다. 천정의 돔을 형성하는 리브들이 벽으로 내려오면서 리브 다발의 피어기둥이 된다. 산과 들이 있는 자연의 외부공간에 기둥과 벽과 지붕으로 건축물을 만들면, 그렇게 생겨난 내부 공간은 지금까지 보았던 외부의 자연 공간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건축적 행위로 지어진, 깊이와 너비와 높이가 있는 어떤 비례의 내부화된 공간은 그곳에 들어선 사람에게 감각과 정신을 흔들고, 영혼을 이끌어 신비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장소를 만드는 행위와 공간의 느낌이 만나서 아름다움이 충만한 건축 공간을 만든다. 지어질 당시 성당의 내부는 마루를 깔아서 내부에서 신발을 벗는 형식을 도입하였다. 1968년에 마루를 철거하였다. 지붕 구조는 목조의 아치를 이용하였다. 다양한 전벽돌과 적벽돌을 이용하여 구조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시의 벽돌 생산 방식을 활용한 고딕적 양식 표현을 이룩하였다. 명동대성당에서 사용되었던 벽돌은 수입이나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벽돌에 의하지 않고 용산 한가통 연와소의 흙을 파다가 벽돌을 직접 제작하며 내력벽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명동대성당은 약현성당, 용산신학교 성당 등과 함께 이전 목구조의 전통건축 구축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재료를 이용한 조적조의 건축을 구현한 것으로 건축 기술 및 재료의 사용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명동 성당은 여러 번의 보수와 개수를 거쳐왔다. 지금의 외관은 2002년에서 2005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외벽보수 및 정비공사에 의한 것이다. 모든 벽돌에 번호를 매기고 정밀하게 실측해서 교체와 보수를 수행했다. 신축 당시의 섬세한 시공을 재현한 것 이상이었다. 목재 문과 스테인드글라스, 지붕을 보수하고 정비했다. 사적 제258호(지정일 : 1977년 11월 22일)로 지정된, 목조양식이 혼합된 조적조 근대 건축물은 섬세하게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도시의 아름다움


문화는 삶 자체와 삶의 생산물을 관조하는 태도로 보아야 비로서 발견할 수 있는 탐사 작업이다. 서양에서 그리스 로마 시기와 15세기의 르네상스의 문화 예술의 발전은 그러한 관조적 태도의 성과이다. 개인적 기록과 예술 창작은 문화적 관조의 시작이다. 예술과 학문처럼 문화는 삶의 관조에서 시작하고, 기록하고 창조한 것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확산의 특성을 갖는다.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인 것은 기록에서 시작한 문화를 공유하고 확산하지 않고, 수도원 깊숙이 보관하고 소유하려 했기 때문이다. 도시적 느낌을 기록하는 일은 직접 경험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공감을 시작하려는 일이다. 


느낌은 기억이 되고 기억의 누적은 경험이 된다. 경험은 공감과 공유를 통해서 정보가 된다. 체계와 응용의 단계가 지식이다. 지식은 그것 자체가 문화의 한 요소이면서 문화를 바라보는 틀이 된다. 도시와 건축에서 경험, 정보, 지식으로 확장되는 개인의 느낌은 언어적인 것과 이미지적인 것의 혼합물이다.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도시적 느낌을 공감하는 것, 언어와 이미지로 공유한다는 것은 삶의 토대로서 도시적, 장소적 의미를 깨닫고, 느낀 것을 확장하여 더 아름다운 공감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도시를 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업과 거주의 주민도 있지만 자신 의 목적에 따라서 임시로 체류하고 방문하는 사람도 있다. 도시는 거주민과 유동하는 사람들의 혼성 작용으로 활성화된다. 도시 속의 특정한 지역은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편안한 생활 조건과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쾌적한 환경 즉, 거주성이 가장 중요하다. 거주성은 지역의 사회적 조건과 더불어 지리적 특성과 이미 조성된 도시적 형성물의 물리적 상황에 좌우된다. 



거주성 평가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시각적 환경이다.  시각 환경은 사람이 머무는 내부 공간과 주변의 관계에서 심리에 영향을 주는 개방감, 조망, 채광 등 건축적 요소를 말한다. 특정한 위치에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적 환경을 조망(viewscape)이라고 하고 특정 형태 대상의 주변과 조화로운 정도를 평가하는 것을 경관(landscape)이라고 한다. 조망과 경관은 특정한 시점-어디에서 보는가-과 시야-어디를 보는가- 그리고 시선-어떤 입장에서 보는가-의 문제를 포함한다. 명동 지역을 살펴보기 위해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3차원 공간정보시스템 자료로 입체 지도를 보듯이 하늘에서 명동성당 지역을 바라볼 수 있다. 명동 지역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북사면의 지형 흐름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삼일고가도로가 있었던 삼일대로는 명동지역과 충무로지역을 구분하면서 남북으로 지나간다. 명동지역 북쪽에는 시청 광장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뻗은 을지로가 있다. 수십년 동안 명동 지역은 우리나라의 쇼핑, 금융, 예술을 주도했던 다운타운, CBD였다. 명동지역은 상징적인 기념물의 역할을 하고 있는 동서 양쪽의 오픈스페이스의 두 장소, 동쪽 명동 성당 지역과 서쪽 중국대사관 지역의 중간 영역이다. 명동의 중심에는 뉴욕의 맨하탄 같은 좁은 골목과 높은 빌딩이 있다. 유리 속의 쇼윈도에는 마네킹들이 최신 유행하는 옷들을 입고 있고 핸드백, 패션구두가 LED 조명 아래 반짝인다. 물결 같은 인파 속에 길거리음식과 액세서리 가판점의 거리가 방콕의 미래 버전 같다. 오랜 동안 사건들이 중첩되어 왔던 역사가 지역 속에 살아 있다. 좁고 넓은 길들이 혼재하고 높고 낮은 건물들이 복잡하지만 시각적인 질서를 갖고 있다. 그 도시의 거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즐기며 북적이는 사람들이 있다. 명동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쇼핑 재료 들을 준비해서 가판 장사에 나서는 젊은 사람들의 의욕과 즐김의 활기찬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살아있는 도시를 걷는 것은 즐겁다.       


2019  0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