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한옥 뉴스레터 53호
- 문화원형,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
- 색 표현의 변화와 확장, 고유함과 범용성 사이에서 🔷
- 📢 <한국의 파랑> 리커버 프리오더 소식
- 🔎 한국의 파랑 프리뷰 - 파랑으로 발견하는 역사와 문화
- 설화와 문학작품 속 파랑을 전하는 메신저, 파랑새 🐦
문화원형,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

낙산사 / ⓒ 월간한옥
문화원형(文化原型)이란 '문화'와 '원형'의 합성어로, 고유의 민족적 특성을 담고 있는 공감대의 산물을 뜻합니다. 정식적 원형뿐만 아니라 물질적 원형까지 포함되며,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통해 형성되는 민족 구성원 간의 공감대와 주체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세계가 다양한 형태로 교류하고,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며, 복잡한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시대에는 '민족'의 의미가 점차 옅어져 갈 것입니다. 이민자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고유한 민족성'에 대한 정의도 바뀌어 가겠죠. 색은 숫자와 알파벳으로 구성된 디지털 언어로 전 세계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되며, 한국은 길거리에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종종 마주칠 정도로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 그것이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회가 된 것은 아닐 테지만요.
'민족'의 문제를 벗어나 전통과 문화의 정체성을 연구, 기록하는 일은 현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행위 그 자체로 인간의 본능적인 탐구욕이며 인문학적인 행위입니다. 고유한 색의 상징과 표현을 살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가 변할지라도 과거와 역사에 그 뿌리가 있으며, 각 문화권이 자라난 지리적 특성과 자연환경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에도 여전히 고유함이라는 건 존재한다는 의미죠.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한국의 파랑> 리커버 프리오더를 맞이해, 책에는 담지 못한 '색(色)'에 담긴 문화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색 표현의 변화와 확장, 고유함과 범용성 사이에서

RGB, CMYK, HEX 같은 용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모두 색을 표현하는 체계입니다. 기존의 문자 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색을 표현할 수 있죠. 시각적으로는 같은 색으로 인식되더라도 다른 문자로 쓰이며 알파벳과 숫자로 구성되기 때문에 범용성이 높습니다. 한편으로는 고유한 심상을 담은 색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죠.
RGB는 가장 기본적인 색 표현방식으로 빛의 삼원색인 Red, Green, Blue를 0부터 255까지의 수치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표현방식인 만큼 색이 인식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빛'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CMYK는 Cyan(시안=파랑), Magenta(마젠타=빨강), Yellow(노랑), Black(검정)의 4가지 색을 조합하여 표현하는 색 표현법입니다. 인쇄출력물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포토샵 등에서 RGB로 작업했더라도 인쇄하려면 반드시 CMYK 컬러값으로 변환해야 색손실 없이 인쇄가 가능하죠. HEX는 0-9의 숫자와 알파벳 A-F를 조합하여 6자리의 문자로, 맨 앞에 # 기호를 붙여 색상을 표현합니다. 이는 RGB 컬러를 코딩에 용이하도록 프로그래밍 언어인 16진법로 나타낸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색 표현은 인쇄 기계, 디지털 프로그래밍 등 인류가 발전하며 생긴 새로운 색의 언어입니다.

ⓒ 월간한옥
인류의 문화는 '색'과 함께 해왔습니다. 디지털이나 인쇄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도 물론이죠. 염료 등을 만들어 색을 구현하기도 했지만, 최초에 색에 대한 인식은 자연물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현재까지 사용하는 단어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파란색에서 파랑의 어근은 '팔-'이며 접미사 '-앙'이 붙어 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근 '-팔'은 '풀(草)'에서 변한 것으로, '푸르다'는 '풀'에서 나온 형용사이며 '파랗다'는 '풀'이 '팔'로 변하며 생긴 표현입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해초의 하나인 '파래'도 그 어원은 '풀'로 어근 '-팔'에 어미로 '바다 해(海)'가 붙은 것으로 바다의 풀이라는 뜻입니다. 풀매는 것을 '김맨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김 또한 '풀'의 뜻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산 가로림만 감태, <한국의 파랑> 중에서 / ⓒ 월간한옥
이처럼 파랑은 '풀'에 그 기원이 있는 만큼 그와 비슷한 심상을 갖습니다. 풀이 피어나는 봄과 우거지는 여름은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계절입니다. 이 무렵 우리 주변은 '푸른' 풍경으로 물듭니다. 이런 계절의 생동감에 빗대어 '청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신호등의 파란불에서 발을 움직여 횡단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빨간 불에서 우리는 멈춰있습니다. '위험'을 나타낼 때 상징적으로 붉은색을 쓰곤 하죠. '붉다'는 불의 빛깔에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직감적으로 뜨겁고 위험하다 느끼는 대상이죠. 귀여운 병아리를 닮은 노란색은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 유치원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색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 속에서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죠.
누를 황(黃)의 경우에는 농경사회였던 우리 문화가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밭 전(田)에 음(音)을 나타내는 빛 광 (光)이 합하여 생겨난 것으로 땅의 색, 그러니까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벼가 익었을 때와 비슷한 금빛 노란색을 의미하게 됐다는 것이죠.
색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기도 합니다만 '색'에 대한 탐구를 통해 고유한 환경, 문화, 역사적 특성 등 다양한 문화원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파랑> 리커버 프리오더 소식 📘

<한국의 파랑> 리커버, 월간한옥, 2023.06
작년 여름호로 출간과 동시에 절판되었던 월간한옥 N.32호 특별판 <한국의 파랑>이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다시, 이 책> 리커버 도서 공모전에 선정되어
새로운 파랑의 이야기를 담아 출간되었습니다.
올해 여름도 한국의 파랑으로 시원한 여행을 떠나보세요 🌊🌊
기존에 수록된 기사를 포함하여 조선 태조 어진, 편경, 단청, 청춘에 대한 새로운 기사 네 편이 추가되었습니다.
*'200부 한정'의 프리오더 기간은 '8월 10일'까지!
<한국의 파랑> 리커버 프리오더 자세히 보기
🔎 <한국의 파랑> 프리뷰

낙산사 청기와 ⓒ 월간한옥
우리나라 청기와 역사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에 이르게 된다. 청자의 나라로 기억되는 고려의 귀족들은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사랑했다. 그들은 은은한 비취색 청자에 매료되어 청자로 기와를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된다. 고려 불화의 전각들에는 푸른색 지붕이 많이 등장하며, 고려사(高麗史)에는 의종 때 궁원에 ‘양이정’이라는 건물의 지붕을 청자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호화로운 귀족문화가 꽃피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절제와 지조를 바탕으로 한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깨끗한 흰색, 백자를 선호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청기와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노동력과 큰 비용이 필요했기에 청렴과 검소함 같은 유교적 가치를 미덕으로 여기는 조선은 청기와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고려시대에 염초(청기와의 색을 내는 재료 중 하나)가 보급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제작 과정에서의 차이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염초는 구하기 어려웠고, 재료 배합과 만드는 숙련도에 따라 그 성능이 달라지기에 보급부터 관리까지의 모든 과정이 까다로운 안료였다. 게다가 염초를 추출하여 농축하고 정제하기까지 많은 양의 노동력과 땔감이 필요했다. 또한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는 조선 후기 전란 이후 생산하는 데 더욱 어려움이 있어 비싼 값을 주고 수입에 의존해야만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왕들이 청기와를 궁궐 건축에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신하들의 원성을 샀다.

선정전 청기와 ⓒ 월간한옥
세종 때부터 긴 조선의 역사 동안 왕들은 청기와 건축을 시도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근정전의 추녀를 보수함에 있어 청기와를 사용하려 했다. 이때 승지 허후는 많은 노력과 비용을 요하는 청기와 사용을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성종은 경복궁의 근정문, 홍례문, 광화문 등을 청기와로 덮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백성을 역사시켜 구워 만드는 일”이라는 신하들의 청에 의해 실패하였다. 중종은 명나라 사신 접대를 위해 경회루를 화려한 청기와로 잇고자 하였으나, 흉년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검소함을 보여주자는 신료들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해야만 했다.
이에 반해 세조가 도성 내 원각사를 창건하며 8만 장의 청기와를 굽도록 했을 당시 이를 반대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연산군 때는 심지어 창의문 밖 능선을 따라 지은 장랑 모두를 청기와로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청기와의 사용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청기와편의 발굴과 기록에 의하여 추측할 수 있는 조선시대 청기와 건축물은 모두 왕권을 상징하는 궁궐 중에서도 임금과 가장 밀접한 공간인 정전이나 편전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청기와가 사용된 사찰 원각사, 봉선사, 장의사 역시 모두 조선왕실과 관련된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선정전 청기와, 청색에 매혹된 조선의 왕', <한국의 파랑> 중에서
설화와 문학작품 속 파랑을 전하는 메신저, 파랑새 
큰 유리새 수컷, 위키피디아 ⓒ Alpsdake
우리 문화에서 파랑은 보통 청춘이나 자연의 푸르름과 역동성,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다를 상징하며 으레 긍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인식되었는데요. 과거의 미디어이자 콘텐츠 역할을 했던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파랑은 어떨까요.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서는 상징성을 가진 '파랑새'가 종종 등장했는데요. 신라 시대의 학자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에는 <청조(靑鳥, 파랑새)가>란 제목의 한역가(한문으로 된 노래)가 실려 있는데요. '파랑새가 내 콩밭에 머물다가 구름 위로 날아가 버린 것'이라는 구절에서 '파랑새'는 잃어버린 사랑, 이별, 그리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우리 민요 <파랑새요> 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민중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출하는 기능을 했다고 해석됩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화가이자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이 쓴 시 <선궁을 바라보며>와 <선계를 노니는 노래>에서는 각각' 구슬 꽃 산들바람에 청조는 하늘하늘 날고', '잠시 청조를 앞세워 유랑을 찾게 했네'라는 표현으로 파랑새(청조)를 통해 신성함과 영험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김시습의 <유선가>, <문청조성유감> 등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요. 이러한 파랑새는 작품 속에서 화자가 신성함을 지닌 파랑새에게 말을 건네며 자신의 희망을 이루게끔 도와줄 조력자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문화재청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이 다 지어질 무렵 한 노인이 나타나 주지 스님에게 법당 안 벽화를 그리려고 하니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남기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49일째 되던 날 주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문에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도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문 채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파랑새는 대체로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움, 신성함과 영험함, 희망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확히 이 '파랑새'가 구체적으로 어떤 새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조들은 어떤 새를 보고, 상상하며 '파랑새'라 적고 표현했을까요. 벽화를 그리다 날아간 파랑새는 어떤 새였을까요. 한반도에서 실제로 마주칠 수 있는 파랑새는 '큰 유리새'나 '청호반새' 같은 새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숲이 줄어든 도시에서 이 새들을 보기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청호반새'는 멸종위기 2급으로 지정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물로 빗대어 하는 표현이 많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까치와 반가운 손님을 연상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의 기원을 쫓아가면 어떤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파랑>을 통해 자연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우리의 푸른 색을 쫓아가며 다양한 시대를 여행해보세요.
발행인 Publisher
박경철 Kyoungcheol Park
뉴스레터 편집장 Editor in Chief
이경근 Gyunggeun Lee
기자 Editor
윤성빈 Sungbin Yoon
권혜리 Hyeri Kwon
송윤하 Yoonha Song
월간한옥 뉴스레터 53호
문화원형,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
낙산사 / ⓒ 월간한옥
문화원형(文化原型)이란 '문화'와 '원형'의 합성어로, 고유의 민족적 특성을 담고 있는 공감대의 산물을 뜻합니다. 정식적 원형뿐만 아니라 물질적 원형까지 포함되며,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통해 형성되는 민족 구성원 간의 공감대와 주체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세계가 다양한 형태로 교류하고, 긴밀하게 이어져 있으며, 복잡한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시대에는 '민족'의 의미가 점차 옅어져 갈 것입니다. 이민자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고유한 민족성'에 대한 정의도 바뀌어 가겠죠. 색은 숫자와 알파벳으로 구성된 디지털 언어로 전 세계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되며, 한국은 길거리에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종종 마주칠 정도로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 그것이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회가 된 것은 아닐 테지만요.
'민족'의 문제를 벗어나 전통과 문화의 정체성을 연구, 기록하는 일은 현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행위 그 자체로 인간의 본능적인 탐구욕이며 인문학적인 행위입니다. 고유한 색의 상징과 표현을 살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가 변할지라도 과거와 역사에 그 뿌리가 있으며, 각 문화권이 자라난 지리적 특성과 자연환경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에도 여전히 고유함이라는 건 존재한다는 의미죠.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한국의 파랑> 리커버 프리오더를 맞이해, 책에는 담지 못한 '색(色)'에 담긴 문화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색 표현의 변화와 확장, 고유함과 범용성 사이에서
RGB, CMYK, HEX 같은 용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모두 색을 표현하는 체계입니다. 기존의 문자 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색을 표현할 수 있죠. 시각적으로는 같은 색으로 인식되더라도 다른 문자로 쓰이며 알파벳과 숫자로 구성되기 때문에 범용성이 높습니다. 한편으로는 고유한 심상을 담은 색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죠.
RGB는 가장 기본적인 색 표현방식으로 빛의 삼원색인 Red, Green, Blue를 0부터 255까지의 수치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표현방식인 만큼 색이 인식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빛'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CMYK는 Cyan(시안=파랑), Magenta(마젠타=빨강), Yellow(노랑), Black(검정)의 4가지 색을 조합하여 표현하는 색 표현법입니다. 인쇄출력물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포토샵 등에서 RGB로 작업했더라도 인쇄하려면 반드시 CMYK 컬러값으로 변환해야 색손실 없이 인쇄가 가능하죠. HEX는 0-9의 숫자와 알파벳 A-F를 조합하여 6자리의 문자로, 맨 앞에 # 기호를 붙여 색상을 표현합니다. 이는 RGB 컬러를 코딩에 용이하도록 프로그래밍 언어인 16진법로 나타낸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색 표현은 인쇄 기계, 디지털 프로그래밍 등 인류가 발전하며 생긴 새로운 색의 언어입니다.
ⓒ 월간한옥
인류의 문화는 '색'과 함께 해왔습니다. 디지털이나 인쇄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도 물론이죠. 염료 등을 만들어 색을 구현하기도 했지만, 최초에 색에 대한 인식은 자연물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현재까지 사용하는 단어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파란색에서 파랑의 어근은 '팔-'이며 접미사 '-앙'이 붙어 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근 '-팔'은 '풀(草)'에서 변한 것으로, '푸르다'는 '풀'에서 나온 형용사이며 '파랗다'는 '풀'이 '팔'로 변하며 생긴 표현입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해초의 하나인 '파래'도 그 어원은 '풀'로 어근 '-팔'에 어미로 '바다 해(海)'가 붙은 것으로 바다의 풀이라는 뜻입니다. 풀매는 것을 '김맨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김 또한 '풀'의 뜻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산 가로림만 감태, <한국의 파랑> 중에서 / ⓒ 월간한옥
이처럼 파랑은 '풀'에 그 기원이 있는 만큼 그와 비슷한 심상을 갖습니다. 풀이 피어나는 봄과 우거지는 여름은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계절입니다. 이 무렵 우리 주변은 '푸른' 풍경으로 물듭니다. 이런 계절의 생동감에 빗대어 '청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신호등의 파란불에서 발을 움직여 횡단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빨간 불에서 우리는 멈춰있습니다. '위험'을 나타낼 때 상징적으로 붉은색을 쓰곤 하죠. '붉다'는 불의 빛깔에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직감적으로 뜨겁고 위험하다 느끼는 대상이죠. 귀여운 병아리를 닮은 노란색은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 유치원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색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 속에서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죠.
누를 황(黃)의 경우에는 농경사회였던 우리 문화가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밭 전(田)에 음(音)을 나타내는 빛 광 (光)이 합하여 생겨난 것으로 땅의 색, 그러니까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벼가 익었을 때와 비슷한 금빛 노란색을 의미하게 됐다는 것이죠.
색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하기도 합니다만 '색'에 대한 탐구를 통해 고유한 환경, 문화, 역사적 특성 등 다양한 문화원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파랑> 리커버, 월간한옥, 2023.06
작년 여름호로 출간과 동시에 절판되었던 월간한옥 N.32호 특별판 <한국의 파랑>이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다시, 이 책> 리커버 도서 공모전에 선정되어
새로운 파랑의 이야기를 담아 출간되었습니다.
올해 여름도 한국의 파랑으로 시원한 여행을 떠나보세요 🌊🌊
기존에 수록된 기사를 포함하여 조선 태조 어진, 편경, 단청, 청춘에 대한 새로운 기사 네 편이 추가되었습니다.
*'200부 한정'의 프리오더 기간은 '8월 10일'까지!
<한국의 파랑> 리커버 프리오더 자세히 보기
🔎 <한국의 파랑> 프리뷰
낙산사 청기와 ⓒ 월간한옥
우리나라 청기와 역사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에 이르게 된다. 청자의 나라로 기억되는 고려의 귀족들은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사랑했다. 그들은 은은한 비취색 청자에 매료되어 청자로 기와를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된다. 고려 불화의 전각들에는 푸른색 지붕이 많이 등장하며, 고려사(高麗史)에는 의종 때 궁원에 ‘양이정’이라는 건물의 지붕을 청자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호화로운 귀족문화가 꽃피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절제와 지조를 바탕으로 한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깨끗한 흰색, 백자를 선호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청기와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노동력과 큰 비용이 필요했기에 청렴과 검소함 같은 유교적 가치를 미덕으로 여기는 조선은 청기와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고려시대에 염초(청기와의 색을 내는 재료 중 하나)가 보급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제작 과정에서의 차이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염초는 구하기 어려웠고, 재료 배합과 만드는 숙련도에 따라 그 성능이 달라지기에 보급부터 관리까지의 모든 과정이 까다로운 안료였다. 게다가 염초를 추출하여 농축하고 정제하기까지 많은 양의 노동력과 땔감이 필요했다. 또한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는 조선 후기 전란 이후 생산하는 데 더욱 어려움이 있어 비싼 값을 주고 수입에 의존해야만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왕들이 청기와를 궁궐 건축에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신하들의 원성을 샀다.
선정전 청기와 ⓒ 월간한옥
세종 때부터 긴 조선의 역사 동안 왕들은 청기와 건축을 시도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근정전의 추녀를 보수함에 있어 청기와를 사용하려 했다. 이때 승지 허후는 많은 노력과 비용을 요하는 청기와 사용을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성종은 경복궁의 근정문, 홍례문, 광화문 등을 청기와로 덮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백성을 역사시켜 구워 만드는 일”이라는 신하들의 청에 의해 실패하였다. 중종은 명나라 사신 접대를 위해 경회루를 화려한 청기와로 잇고자 하였으나, 흉년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검소함을 보여주자는 신료들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해야만 했다.
이에 반해 세조가 도성 내 원각사를 창건하며 8만 장의 청기와를 굽도록 했을 당시 이를 반대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연산군 때는 심지어 창의문 밖 능선을 따라 지은 장랑 모두를 청기와로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청기와의 사용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청기와편의 발굴과 기록에 의하여 추측할 수 있는 조선시대 청기와 건축물은 모두 왕권을 상징하는 궁궐 중에서도 임금과 가장 밀접한 공간인 정전이나 편전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청기와가 사용된 사찰 원각사, 봉선사, 장의사 역시 모두 조선왕실과 관련된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선정전 청기와, 청색에 매혹된 조선의 왕', <한국의 파랑> 중에서
설화와 문학작품 속 파랑을 전하는 메신저, 파랑새
큰 유리새 수컷, 위키피디아 ⓒ Alpsdake
우리 문화에서 파랑은 보통 청춘이나 자연의 푸르름과 역동성,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다를 상징하며 으레 긍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인식되었는데요. 과거의 미디어이자 콘텐츠 역할을 했던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파랑은 어떨까요.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서는 상징성을 가진 '파랑새'가 종종 등장했는데요. 신라 시대의 학자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에는 <청조(靑鳥, 파랑새)가>란 제목의 한역가(한문으로 된 노래)가 실려 있는데요. '파랑새가 내 콩밭에 머물다가 구름 위로 날아가 버린 것'이라는 구절에서 '파랑새'는 잃어버린 사랑, 이별, 그리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우리 민요 <파랑새요> 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민중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출하는 기능을 했다고 해석됩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화가이자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이 쓴 시 <선궁을 바라보며>와 <선계를 노니는 노래>에서는 각각' 구슬 꽃 산들바람에 청조는 하늘하늘 날고', '잠시 청조를 앞세워 유랑을 찾게 했네'라는 표현으로 파랑새(청조)를 통해 신성함과 영험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는 김시습의 <유선가>, <문청조성유감> 등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요. 이러한 파랑새는 작품 속에서 화자가 신성함을 지닌 파랑새에게 말을 건네며 자신의 희망을 이루게끔 도와줄 조력자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문화재청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이 다 지어질 무렵 한 노인이 나타나 주지 스님에게 법당 안 벽화를 그리려고 하니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남기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49일째 되던 날 주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문에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도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문 채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파랑새는 대체로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움, 신성함과 영험함, 희망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확히 이 '파랑새'가 구체적으로 어떤 새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조들은 어떤 새를 보고, 상상하며 '파랑새'라 적고 표현했을까요. 벽화를 그리다 날아간 파랑새는 어떤 새였을까요. 한반도에서 실제로 마주칠 수 있는 파랑새는 '큰 유리새'나 '청호반새' 같은 새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숲이 줄어든 도시에서 이 새들을 보기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청호반새'는 멸종위기 2급으로 지정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물로 빗대어 하는 표현이 많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까치와 반가운 손님을 연상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의 기원을 쫓아가면 어떤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파랑>을 통해 자연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우리의 푸른 색을 쫓아가며 다양한 시대를 여행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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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Kyoungcheo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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