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오페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뉴욕 구겐하임까지 이어진 인연
<구미 쌍암고택>
형제애와 나눔경영 실천하다
글, 사진 : 차장섭
구미 쌍암고택(雙巖古宅)은 해평 최부잣집이다. 해평 최부잣집은 해평에 세거(世居)하던 전주최씨 집안으로 전답이 6만 석에 이르는 땅 부자였다. 그리고 2만 권의 책을 소장한 학문의 부자였으며, 많은 과거 급제자와 병조참판 등 관료를 배출한 벼슬의 부자였다.
전주최씨 해평 입향조(入鄕祖)는 7대손인 비안현감 최수지(崔水智)이다. 현재의 김천부근인 개령의 현감으로 재직하던 부친을 따라왔던 최수지는 선산의 사림들과 교류를 하게 되고, 마침내 해평김씨 김영발(金英發)의 손자사위가 되었다. 당시는 남녀균분상속으로 딸에게 재산이 분배되었음으로 처가 또는 외가에 정착하는 경우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해평의 명승을 좋아했던 최수지는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세거하던 경남 진주를 떠나 처가가 있던 해평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후손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최응룡(崔應龍)이 형조참판을 최현(崔晛) 강원도관찰사, 최산립(崔山立)은 진보현감을 역임하였고, 최산휘(崔山輝)는 공신으로 청송부사를 역임하는 등 벼슬살이를 위해 주로 한양에 거주하였다.
한편 다시 전주최씨가 한양에서 선산 해평으로 낙향하여 정착한 것은 최두추(崔斗樞)이다. 전주최씨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서 중앙관직을 역임하면서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으나 최산휘 이후 별다른 관직에 오르지 못함으로써 집안이 궁핍하게 되자 최산휘(崔山輝)의 4대손 최두추는 다시 해평으로 낙향하였다.
해평으로 낙향한 집안을 다시 일으킨 사람은 최두추의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였다. 파평윤씨는 비록 대갓집 규수로 시집을 왔지만 남자 못지않은 강인함으로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길쌈과 삯바느질 등 험한 노동을 통해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리고 근검절약의 생활을 통해 당대에 천 석의 재산을 모았다. 파평윤씨 부인이 낡아서 해진 치마를 천 조각의 천으로 기워서 입었다 하여 후손들은 파평윤씨 부인은 ‘천쪽보 치마 할매’로 불리운다. 천쪽보 치마는 50년 전까지도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전해져 왔으며, 파평윤씨 할머니의 근검절약 생활정신은 가풍이 되어 후손들의 생활지침이 되었다. 파평윤씨가 모은 천 석의 재산은 손자 최광익(崔光翊)에 의해 6만 석이 되었다.
최두추와 파평윤씨 사이에는 최수태(崔壽泰)와 최수인(崔壽仁) 두 아들이 있었으나 맏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인 최수인 만이 아들 여섯 형제를 낳았다. 최광옥(崔光玉), 최광악(崔光岳), 최광벽(崔光璧), 최광익(崔光翊), 최광직(崔光稷), 최광적(崔光迪)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넷째인 최광익(崔光翊)은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에 비해 이재(理財)에 밝고 산술에 능하였으며, 두뇌가 총명하여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진사(進士)에 올랐지만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거부(巨富)의 꿈을 꾸고 있었다. 양반 가문의 후예로 돈벌이를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부모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하여도 가문을 빛내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재산은 자신이 모을 테니 형제들은 학업에 열중하여 학자로서 관료로서 가문을 빛내라고 하였다. 마침내 최광익(崔光翊)은 천부적인 상술(商術)을 통해 거부가 되었다. 그는 낙동강과 넓은 평야를 지리적 조건을 갖춘 구미 해평이 육로와 수로의 중심지임을 간파하고 전국을 상대로 장사를 하였다. 소금이 모자랄 때는 낙동강 수로를 통해서 소금 장사를 휘어잡고, 흉년이 들었을 때는 영남 내륙의 쌀장사를, 그리고 태평시절에는 포목과 인삼을 취급하는 전국의 거상(巨商)들과 손을 잡았다.
최광익의 경영방식은 6만 석의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는 재물을 나누고 베푸는 방식에서 더욱 빛이 났다. 최광익은 6만 석의 재산을 여섯 형제에게 똑같이 나눔으로써 6형제 만석꾼 집안이 되었다. 6형제의 집도 똑같이 대지 2천 5백 평에 80칸짜리 대저택을 지어서 나누었다. 그리고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근검절약의 정신을 생활신조로 삼아 자신은 항상 소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이웃과 선비들을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이웃을 위해서는 흉년이 들면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었고, 관혼상제 때에는 풍족하게 부조를 하였다. 특히 형 최광벽이 병조참판을 지낼 때는 나라에 군량미를 보내기도 하였다.
후손의 학업과 학문을 하는 선비들을 위해 장서각 백일루(百日樓)를 지어 선비들과 교류하였다. 영남과 서울을 잇는 길목에 자리한 백일루에는 2만 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어서 경향각지에서 학문을 하는 선비들의 출입이 많았다. 형 병조참판 최광벽이 낙향한 후에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문중 서당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서 백일루는 영남지역 학문과 학업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이곳을 방문한 선비를 비롯한 과객들에게 후한 대접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음식 가운데 최고의 밀가루로 면을 뽑고,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에 중국에서 수입한 조미료로 만든 ‘해평 최부자집 국수’는 그 명성이 서울 장안에까지 퍼져 있었다.
쌍암고택(雙巖古宅)은 최광익(崔光翊, 1731-1795)이 분가하여 지은 살림집이다. 최광익은 최성우(崔成羽)와 최승우(崔昇羽) 두 아들을 두었는데, 1788년(정조 12년)에 쌍암고택 북쪽 언덕 위에 둘째 아들 최승우(崔昇羽)를 위해 북애고택(北厓故宅)을 지었다. 그런데 집이 완공된 후에 둘째 최승우는 첫째 최성우와 집을 바꾸었다. 마을의 안쪽 높은 곳이 상위(上位)라는 인식에 큰집이 북애고택으로 가고 동생 집이 앞쪽 아래에 자리한 쌍암고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쌍암고택에 거주하던 문학공(文學公) 최승우가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집이 자주 비게 되자 쌍암고택은 첫째 최광옥(崔光玉)의 둘째인 통덕랑 최장우(崔章羽)의 후손이 옮겨와 세거하게 되었다.
쌍암고택이라는 당호는 집 앞에 두 개의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쌍암고택은 앞쪽부터 차례대로 행랑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쌍암고택의 사랑채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은 사랑채는 최광익이 처음으로 지은 것으로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앞쪽의 큰 사랑채는 최승우가 북애고택과 집을 바꾼 이후인 1798년(정조 13년)에 새롭게 지은 사랑채이다. 작은 사랑채는 시집가는 딸에게 혼수로 보내면서 철거가 되고, 현재는 큰사랑채만 남아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 구성은 왼쪽 2칸에 온돌방을 田자형으로 배치하였고, 오른쪽 2칸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대청 뒤쪽 1칸은 한 단을 높여 제청(祭廳)을 뒀다. 대청마루에 걸린 현판 효사와(孝思窩)는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최열 종손의 친필이다. 안채는 ᅳ자형의 중문간채와 ᄃ자형의 정침이 튼 ᄆ자형의 배치를 하고 있다. 안채 중심인 대청은 6칸 크기로 인근 지역에선 보기 드문 규모다. 대청 벽에는 탁자형 시렁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청 왼쪽 윗벽에 설치된 긴 시렁과 앞 기둥에 설치된 5단 탁자형 시렁은 좀처럼 보기 힘든 가구다. 시렁은 세면도구 등 간단한 소도구를 얹어두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집안의 실용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사당은 전면 3칸으로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쌍암고택은 동학농민군의 집결지였다. 동학 때의 일이다. 동학군이 해평 최부자집을 덮치러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미리 곳간을 열어 해평 장터에 가마솥을 걸고 밥과 음식을 해놓고 기다렸다가 동학군들을 푸짐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경남 합천으로 피난을 떠나 가솔 등 인명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고택이 당시 일본군의 병참기지로 사용되는 불운을 겪었다. 쌍암고택 사랑채 앞 마당에는 동학농민전쟁을 기념하는 ‘甲午東學農民軍集結地 朝鮮開國五百三十一月’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쌍암고택은 현재 최광익의 8대 종손 최열(崔烈)이 지키고 있다. 최열은 11남매(9남 2녀) 가운데 차남이지만 평생 장남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형이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깊은 형제애와 나눔의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최근 구미 공단 조성으로 집안의 토지가 개발되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8형제를 위한 집을 지었다. 외지에 살고 있는 형제들이 편안하게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8형제가 머물 수 있는 집을 한 채씩 마련하였다. 선대가 6만 석을 여섯 형제가 똑같이 나누고 같은 규모의 저택을 지어 나누었듯이 종가로써 친족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구심점 역할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