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오페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뉴욕 구겐하임까지 이어진 인연

<두석장 양현승 아현공방>

망치질로 만든 장석 삼중주


글 : 이정화

사진 : 김철성

영상 : 김기현



서울의 어느 대학교 담벼락 아래에는 작고도 단단한 작업장이 있다. 그곳에는 세월의 흔적으로 여기저기 멍이 들고 까진 나무에게, 반짝이는 반창고를 붙여주며 상처를 안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두석장인(豆錫匠人), 혹은 장석장인(裝錫匠人)' 이라고 부른다.


본래 장인이 주로 썼던 금속인 구리합금속에서 유래한 '두석'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왔으나 근래에는 장석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장석은 목가구 등에 장식·개폐용으로 부착하는 금속을 두루 칭하는 말이다. 자물쇠를 비롯해 결구나 모서리 보강을 위한 것으로 번거로운 치장을 절제하던 조선시대 가구에서는최소한의 장식 구실을 겸하였다.



야트막한 계단을 스무 개 즈음 걸어 올라가면 작업장이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탕.탕.탕.탕'하는 소리가 삼중주로 연주된다. 그 소리 사이사이는 연식을 알 수 없는 라디오가 채워 공간을 가득 메운다. 삼중주 연주자는 40년 넘은 배테랑 양현승 장인과, 그와 30년 동안 함께한 김병철 장인, 그리고 20년 차인 막내 양동일 장인이다.


할아버지 댁에 있는 나무 지압봉처럼 부드럽게 굴곡진 정의 끄트머리는 연필이, 동판은 도화지가 된다. 철판 위에 살짝 긁어내듯 밑그림을 긋고, 그 위에 굴곡진 정을 딱 세워, 망치로 정확하게 적당한 힘으로 내리치니 밋밋했던 동판 위에 점차 무늬가 새겨진다.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탕! 탕! 새기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한 번 종이 위에 새겨두면 지워지지 않는 서예와 닮아서 보면 볼수록 궁금해졌다.


작업장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에 다양한 정과 망치가 가득했다. 문양 하나를 만들더라도 정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그와 합이 맞는 망치를 여러 번 바꿔가는 모습에서, 다양한 모필을 가진 나의 붓들이 생각났다. 장갑을 끼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에서, 팔토시와 앞치마가 되레 거추장스러운 내 모습도 보였다. 철판에 망치로 사정없이 정을 두드리는데, 그렇게 휘두르면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히려 망치질하다가 손 다치면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한다는 말이, 손에 먹물 묻히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서예인들끼리의 농담과 겹쳐서 들려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예술은 꽤 닮아있다.

양현승 장인은 1950년대에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직감적으로 내 살길은 스스로 찾아야함을 느끼고, 광주에 계신 외숙이 하시는 장석을 배워보기로 했다. 3년 후, 군대를 다녀온 후 인사동 교동초 앞에 공방을 하나 차리게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서른 무렵이었다. 그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이 길을 걸을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니 그는 살포시 웃으며, 그러나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밥 먹여주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이 났다. 이렇게 솔직하다니. 내 속마음을 말해준 것 같았다. 작품의 가장 큰 영감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는 영 틀린 말이 아니다. 기계화 바람을 잠시 따라가려다가 도저히 맞지 않는 옷임을 느끼고 다시 수작업으로 돌아와 장석을 한평생 넘도록 해온 그에게 장석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님을 안다. 생존이면서, 자존심이다. 후회는 없냐는 물음에 왜 없겠냐며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레이저니 뭐니 해도 망치와 함께 정을 두드리며 나오는 이 모양이 너무 예쁘다고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솔직하게 내가 봐도 내 것이 제일 예뻐요. 난 내 기술에 자신이 있거든."이라는 말에 알 수 없는 응원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일이 아들에게 짐처럼 느껴질까 봐 내심 걱정이라는 장인에게 '이따 제가 살짝 아드님께 여쭤볼게요- 후회하나 안 하나'라고 답했다. 하지만 나 역시 대를 이어서 아버지와 같은 서예가의 길을 꽤 오랫동안 걷고 있기에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들 동일은 장인만큼이나 이 일을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고. 후에 물어보니 그는 역시 후회는 없다며, 생각보다 이 일이 재밌다고 밝게 웃었다.


장인의 아들이자 20년 차 막내를 맡고 있는 동일에게 '아버지 양현승', 그리고 '선배 양현승'. 어떤 차이가 있으냐고 물었더니 잔소리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과묵하시지만 일을 할 때는 잔소리가 심해지신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 부자를 가장 곁에서 지켜본 기술자 병철 역시 맞다고 동조했다. 다칠까 봐 그렇겠지만, 아들에게 아주 매섭고 무안하게 가르친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는 양현승 장인에게 아들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것 같냐고 물었더니, 아직 부족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잘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장인과 기술자, 그리고 아들 동일은 각자의 수준만큼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이 없다고도. 이 말을 듣고 기술자 병철은 그래도 묵묵하게 곧잘 따라오는 아들 동일은 본인이 봐도 참 기특하다고 한 번 더 동조했다.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니 나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오랜 세월 동학하신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이들은 얼마나 이 대화가 시리도록 아름다운지 느껴질까? 아마 모를지도. 나도 내가 인터뷰어가 되어본 이 기회가 아니었다면 깊게 느껴지지 못했을 테니까.


장인과 30년 넘게 함께 작업을 한 기술자 병철은 중간에 샛길로 빠진 일이 허다했다며 스스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업계에서 가장 세심하게 작업하는 장인의 기술이 눈에 아른거려서 다시 돌아왔다. '장석무늬만큼은 저 양반을 따라갈 자가 없다.'라는 말에서 얼마나 크고 깊은 믿음이 있는지 굳이 말로 덧붙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그러나 이 세 사람은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우주처럼, 서로를 말없이 보듬어주고 있었다. 아마도 서로의 아픔을 안아주는 장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의 흔적으로 여기저기 멍이 들고 까진 나무를, 아주 포근하게 안아주며 반짝이는 모습으로 새 삶을 응원하는 장석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