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오페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뉴욕 구겐하임까지 이어진 인연
<로봇 오페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뉴욕 구겐하임까지 이어진 인연
글 : 김수경
사진 : 김민형
내가 백남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4년 비엔나 현대미술관에서였다. 여러 기발한 현대미술 작품들 사이에 깨진 피아노와 색동의 그림 두 점이 걸려있었는데,(당시 내 생각으로는 참 못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작품보다 눈에 띈 것은 '한국 출신의 미국 작가 백남준'이라 적힌 전시 캡션이었다. 깨진 피아노나 색동의 무늬 위에 그리듯 쓰인 서툰 한글, 이런 것도 미술이라고도 부른 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마음으로 느끼려면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 이 시대, 현대라는 것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백남준의 작품은 그런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깊이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곤 얼마 후, 나는 파리에서 살게 되었다. 퐁피두센터에서 제 2세대 '플럭서스'라는 '폴리포닉스 워크샵'이 2주간 열리게 되었는데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 세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등록하였다. 어느 젊은 미국 시인이 재즈에 맞추어 백남준의 <로봇 오페라>를 공연했다. 짧고 간단한 시였다. 60년대 밀라노 '플럭서스'에서 백남준이 낭독한 것이라고 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너무 시끄럽고 폰 카라얀은 너무 지루해, 로봇 오페라 로봇 오페라"
한국적인 전통과 서양의 고전에 대한 태도 등 내적 갈등과 고민이 많았던 내게 그 시는 백남준이 던져준 힌트 같았다. 새로운 지평이었다. 죠셉 보이스를 알게 되었고, 인생의 모험에 뛰어들 용기를 얻었고, 예술이란 주어진 가치의 전복과 혁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은 그를 만나게 되어 인사를 나누게 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분의 소개로 몇 년 뒤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그는 뇌졸중을 앓아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열망은 구겐하임 전관에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1955년 한국을 떠나면서 '세계의 백남준'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의 여정의 종착지는 뉴욕의 구겐하임이었고 그 공간은 그에게 '세계'로 표상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구겐하임 측에서는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도 백남준의 작품이 너무 실험적이라 여겼고, 전시로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구겐하임 관계자는 약 140만 달러 정도의 손해를 예상했다. 구겐하임은 보증인을 요구했고 나는 140만 달러 중 130만 달러를 보전하겠다는 보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백남준 전시는 유례없는 역사적 성공을 거두었고 나는 돈을 물어내기는 커녕 감사의 인사만 받았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이 되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긴 인연이다.